<공중그네>의 이상하고 유쾌한 정신과 의사 이라부가 17년 만에 돌아왔다. 저마다의 스트레스로 고심하는 환자들이 여전히 그의 진료실을 두드리고 있다. 시청률에 목을 매다 자신도 알지 못한 사이 괴물이 되어버린 공중파 PD, 도를 넘는 타인의 행동을 보고 화가 나지만 제대로 화를 내는 법을 알지 못해 속병을 앓다 공황발작이 온 세일즈맨, 히키코모리로 살면서 초단기 주식 단타 매매로 100억 원대 자산을 소유하게 되었지만 허망함을 느끼는 청년, 평범하고 착실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작스런 광장공포증을 앓게 된 피아니스트, 비대면 수업 후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대학생. 각기 다른 마음의 병을 앓는 이들은 이라부의 황당무계하면서도 기발한 처방을 따르다 치유된 자신을 발견한다.
“괜찮아, 괜찮아. 적당히 해도 돼.” 범상치 않은 개성과 아이 같은 천진함으로 무장한 이라부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오쿠다 히데오는 세계를 휩쓴 팬데믹 이후 계속되는 사람들의 혼란과 불안을 느끼며 "닥터 이라부라면 어떻게 반응할까?" 하는 생각으로 신작을 쓰게 되었다고 밝혔다.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의 전홍진 저자가 "코로나 이후 사람들이 느끼는 우울감, 불안감 등 정신 건강의 혼란으로 다시 이라부의 등장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고 추천했고, 이기호 소설가가 "우리 사회가 병들어 있을 때 우리는 너나없이 한 명의 희극배우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 이라부와 마유미는 그 사실을 그저 정직하게 드러내주는 연출과 조연출인 셈이다."라고 말하며 함께 읽은 책.
- 소설 MD 권벼리
이 책의 첫 문장
오후 회의는 언제나 하타야마 게이스케를 우울하게 만든다.
이 책의 한 문장
“후쿠모토 씨의 과호흡증후군의 원인. 알아냈어.”
“뭡니까?”
“말하자면 분노 조절이 안 되는 거야, 후쿠모토 씨의 경우는.”
가쓰미는 그 지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노 조절은 최근에 매스컴에서도 자주 듣는 말이긴 하지만, 툭하면 화를 내는 사람들에 대한 상담의 차원에서 쓰이는 말일 터였다.
가쓰미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이라부가 “금방 화를 내는 것도 문제지만, 제대로 화를 안 내는 것도 문제거든”이라고 덧붙였다.
“이건 일본 사람에게 특히 많이 나타나지. 타인의 규칙 위반이나 부도덕한 행동을 봐도 대립을 피하기 위해 입을 다물어버린다. 그렇게 게속 분노가 쌓여서, 결국은 자기 안에서 폭발해버리는 거지. 후쿠모토 씨의 과호흡이나 공황장애는 거기에서 온 거야. 그러니 쉽게 고칠 수 있어. 화를 내면 돼.”
인간은 세상을 이야기로 이해한다. 인간의 스토리텔링 본성에 대해 분석한 학자 조너선 갓셜은 "인간의 마음이 이야기의 공백을 혐오한다"고 말했다. 아마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고통과 삶마저도 모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공백없는 이야기로 만들어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그가 처한 상황과 마음의 작용을 이해하는 것이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
저자 마리아 투마킨은 고통스러운 사건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이들과 대화하고 이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자살 생존자, 마약 중독자, 나치 집단 수용소 생존자, 홈리스, 가정 폭력 피해자... 이들의 실제 상황은 모두 이들을 향한 통념과 다르다. 책이 진행되는 동안 통념을 배반하는 고유한 서사, 혹은 실상을 배반하는 통념의 사례가 반복해서 쌓인다. 이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한 가지의 진실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의 독창성은 이 진실을 이론으로 설명하거나 설명으로 설득하지 않고 말 그대로 '보여준다'는 데에서 나온다. 에피소드들은 친절하게 나열되지 않고 뒤죽박죽 섞여 있으며 투박하고 낯선 방식으로 서술된다. 타인의 내면을 이해하는 일의 난망함을 글의 구조로 표현했다. 손쉬운 해석을 거칠게 거부하는 책, 그렇다면 우리는 읽기를 포기해야 할까? 투마킨이 말하는 불가능엔 체념이 뒤따르지 않는다. 영원한 실패가 약속된 도전을 기어코 시도하는 것, 연대의 조건이다.
- 인문 MD 김경영
이 책의 한 문장
한 인간에 관한 사실들은 대개 타인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중 대부분은 애초에 타인들이 결코 알아낼 수 없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무시하면 사람들은 상징의 집합체로 변해 버린다. 우리 자신이 좋아하는 음료만 골라 담은 물통으로, 일종의 도구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여기 한 만화 출판사의 중년 편집자가 있다. 담당하던 만화 잡지의 실패 이후 간단하지 않은 이유로 퇴사를 결심하면서 이 만화는 시작된다. 주인공인 시오자와는 퇴사 이후 필사적으로 만화와 멀어지려고 한다. 집안을 가득 채운 만화책을 몽땅 팔아치우려고 사람을 불렀지만 결국 팔지 못한 시오자와는 이전에 자신과 함께 책을 만들었던 만화가들을 하나씩 찾아가기 시작한다. 한때는 반짝반짝 빛이 났지만 이제는 퇴물이 된 사람, 만화가를 진작에 관두고 경비일을 하는 사람, 생계를 위해 그리고 싶지 않은 그림을 그리며 작가로서의 삶을 근근이 유지해가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바로 새로운 만화 잡지를 만드는 일.
<핑퐁> <철콘 근크리트>의 작가, 만화가들의 만화가 마츠모토 타이요가 이제 만화계 대선배가 되어 그려낸 이 만화는 가히 명작이라 부를만하다. 사소한 대사 하나에도 담겨 있는 캐릭터의 생동감과 한 장면도 허투루 쓰지 않은 대가의 연출력은 정말 압도적이다. 이 만화가 대단한 건 그렇지만 만화적 기술과 완성도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안에 깊이 담긴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어쩌면 죽을 때까지 찾아야 할 개개인의 꿈과 열정에 대한 이상을 시답잖은 일상 속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녹여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 앞에 서면 보다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어진다고들 한다. 그리고 이 만화를 읽으며 나는 보다 더 꿈꾸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다양한 곳에서 각자의 만화를 그려나가는 모든 작가, 편집자, 그리고 독자를 위한 책. 2023년의 막바지에 이 만화를 만난 건 정말 행운이라 할 수밖에.
- 만화 MD 도란
큐레이션이라는 개념은 이제 미술관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130만 명의 구독자가 벅스가 큐레이션한 '에센셜essential;'의 플레이리스트를 신뢰하고, 개성있는 독립서점에 가면 눈밝은 운영자가 큐레이션한 도서 목록을 따라 눈동자가 이동한다. 유튜브 채널 구독자는 운영자가 편집한 영상을 신뢰해 그의 취향을 '손민수'(웹툰 <치즈 인더 트랩>에서 유래한, 다른 이의 패션 스타일 등을 따라한다는 뜻)한다. 편집은 인플루언서만의 일이 아니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의 첫 장을 선택하고 카카오톡 프로필 레이아웃을 배치하면서도 우리는 편집을 수행한다. 잡지 에디터로 경력을 시작해 미술관, 그림책을 주제로 한 예술서를 출간했고 기업 브랜딩 영역에서도 '에디토리얼 씽킹'을 실천중인, 20년째 편집하는 사람 최혜진이 '모든 것이 다 있는 시대의 창조적 사고법'을 주제로 한 책을 펴냈다.
의미화되기 전의 '잡음' 속에서 특정 정보에 주목해서 '신호', 다시 말해 의미의 맥락을 만들어가는 작업(29쪽)이라고 저자는 에디팅을 정의한다. 재료 수집부터 연상, 범주화, 레퍼런스, 요점, 프레임, 생략 등 정보를 담고 묶고 헤아리고 쏟는 목차의 각 단계만 살펴도 일이 손에 잡히는 듯하다. 잡지, 미술, 그림책 같은 저자의 활동 분야의 구체적인 예시가 각 단계마다 제시되는데, 니키 리와 노순택 같은 취향의 바다를 오가며 영감이 솟는다. 새해엔 저자가 제시하는 단계를 따라 함께 '에디토리얼 씽킹'을 연습해보자. 구슬이 서 말이라도 편집해야 보배. 당신이 품고 있을 당신만의 보배를 기대한다.
- 예술 MD 김효선
이 책의 한 문장
2010년대부터 신문과 잡지는 손꼽히는 사양 산업이 되었고, 불안과 무기력이 짙은 안개처럼 업계 전체를 덮쳤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잡지가 망해가는 게 아니고 세상이 온통 잡지화하는 걸로 보였기 때문이다. 잡지에서 보던 편집 문법 - 에디터 추천 목록, 큐레이션, 단계별 하우투 정보, 리얼 후기 등 - 이 디지털 서비스 전반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