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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한 문장

이른 11월의 거리는 밤이 끝났음에도 어둑했고, 식료품점 주인이 놀랄 만큼 바람이 벌써 날을 세웠다.

점원. 버나드 맬러머드 지음, 이동신 옮김

제가 저지른 몇 가지 일을 털어놓고 싶습니다, 남자는 여자의 눈을 바라보며 말한다.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다고 상상해 본다. 하지만 남자가 한 말은 상상이 아니다. 사람들을 사라지게 만든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미지의 차원. 노나 페르난데스 지음, 김현우 옮김

「가짜 프롤로그」 일부 어느 날 아침 뒤숭숭한 꿈을 꾸다 눈을 떠보니 나는 흉측하게 생긴 벌레로 변해 있다. 갑옷처럼 딱딱한 내 배는 아치 모양의 마디들로 나누어져 있고, 세 쌍의 다리가 허공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버둥거리고 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눈앞에 생생하고 분명하게 보이는 이 장면은 평소 내가 무심코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만큼이나 실감 난다.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공포는 기억의 산물일까? 아니면 환각이나 환상, 꿈이 빚어낸 결과일까? 만약 한순간 그것이 무엇인지를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내가 여전히 그 허상 안에 있지 않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나는 서둘러 화장실로 간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매일 아침에 보는 것과 똑같은데, 오늘따라 눈 밑의 그늘만 유난히 짙어진 것 같다. 아무리 봐도 벌레 같지는 않다. 벌레로 변한 내 모습은 거짓이고, 악몽의 잔재였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꿈에서 깨어난다. 공포를 일으키기 가장 좋은 방법, 꿈속의 꿈만큼 괴로운 것도 없다. 만약 우리가 그 꿈에서 깨어난다고 해도, 곧장 다른 꿈으로, 그리고 또 다른 꿈으로 무한히 곤두박질치게 되지 않을까? 보르헤스는 이러한 전략을 여러 차례 이용했다. “시간은 갠지스강과 템스강을 꿈꾸었는데, 그것은 모두 물의 이름들이다.” 그는 『음모자들』(1985)에 수록된 시 「누군가 꿈을 꾼다」에서 이렇게 썼다. “시간은 율리시스가 이해하지 못했을 지도를 꿈꾸었다. 시간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를 꿈꾸었다. 시간은 알렉산더를 가로막았던 낙원의 벽을 꿈꾸었다. 시간은 바다와 눈물을 꿈꾸었다. 시간은 수정을 꿈꾸었다. 시간은 누군가가 자기를 꿈꾸는 꿈을 꾸었다.” 이제 내 손이 벌레의 다리로 변한 장면을 분석한다. 이 이미지는 무엇인가? 그것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허구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셰익스피어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꿈과 같은 재료들로 이루어져 있다. 허구라는 말은 가장하거나 속인다는 뜻이 아닌 조각하거나 무언가에 형태를 부여한다는 뜻의 라틴어 동사 fingere에서 유래했다. 이는 도공이 그릇을 만들 때나 조각가가 비너스 상에 생명을 불어넣으려고 할 때 사용하는 용어다. 이보다 더 적절한 어원이 있을까? 현실은 우리가 상상력을 동원해 형태와 부피를 부여하는 점토 덩어리나 마찬가지다. 꿈속의 나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비교해보자. 전자가 거짓인 반면, 후자가 사실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러한 확신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이 두 이미지 사이에 어떤 실질적인 차이가 느껴지는가? 아니, 나의 확신 말고는 어떤 차이도 느낄 수 없다. 만약 거울에 비친 게 진짜 내 얼굴로 보인다면, 그건 그것이 진짜 내 얼굴이라는 것을 내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미지도 그 자체로 진짜가 아니다. 이미지의 진실성 여부는 그것이 진실임을 내게 알려주는 일종의 라벨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누가 그 이미지에 포화지방 과다 섭취 경고 문구와 같은 그런 라벨을 붙이는 걸까? 나의 악몽 이야기로 되돌아가보자. 잠시 망설이던 나는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책의 어느 면에서 그 악몽의 출처를 찾아낸다. 결국 그것은 내가 떠올린 생각이 아니다. 문제의 장면은 나의 내면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 것이다. 누군가가 그 장면을 내 안에 주입했는데, 나는 그것을 내가 실제로 경험한 것으로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지와 관념은 포자나―이쯤 되면 이 비유도 그다지 독창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바이러스와 마찬가지다. 그것들이 나의 뇌에 침투하면 끊임없이 증식하면서 갑자기 내가 감염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결국 나는 허구를 위한 가장 이상적인 번식지인 셈이다. 상상력이 유독 풍부했던 성녀 데레사에게 상상력은 집 안의 미친 여자와 같았다. 상상력은 일단 작동하면 자기 길을 간다. 이런 식으로 변화된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 인간은 누멘, 무사이, 신들, 다이몬들, 두엔데들, 성령, 데카르트의 호문쿨루스 등을 만들어냈다. 물론 영감도 여기에 포함된다. 꿈에서 본 장면을 세부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이불과 침대 가장자리 위로 내 다리가 보인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벽지 무늬가, 왼쪽으로 화장실 문이 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울퉁불퉁한 천장과 전등의 그림자가 눈에 띈다. 그 너머에는 페르시아산 양탄자가 깔려 있다. 이런 공간이라면 몇 시간 동안이고 멍하니 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세부 장면 중 그 어느 것도 내가 보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먼저 이것, 그다음에 저것, 그리고 저 너머에 있는 것…… 만약 꿈이나 삶의 몇몇 장면이 동시에 펼쳐져도 우리는 그것들을 순서대로 떠올린다. 이야기한다는 것은 시간이라는 낚싯바늘에 이미지들을 줄줄이 꿰는 것이다. 지금은 정처 없이 걸어가고 있지만 결국 그 길의 의미를 찾아낼 거라고 믿는 것처럼, 우리는 사건들―우리가 사건들에서 파악해낸 패턴들―의 순서를 정한다. 우리는 괴팍하고 변덕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기계다. 만약 감각이 우리를 속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동안 수많은 철학자와 과학자가 노력해왔지만, 이 문제는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내 눈에서 뇌로 가는 정보보다 내 뇌에서 눈으로 흘러가는 정보가 더 많다. 나는 세계를 만들어내진 않지만, 색칠 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그 세계를 채워 넣는다. 온 우주가 내 안에 담겨 있다. 바다와 하늘, 별들과 행성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친구들, 그리고 나를 싫어하는 이들까지 모두. 바깥에 있는 것은 영원히 나와 무관할 뿐만 아니라 손을 댈 수도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을 허구로, 잔인하지만 내게는 금단의 영역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추방된 낙원이다. 나는 베개 밑에 가족사진을 숨겨놓은 죄수처럼 내 안에 세계를 간직한다. 그럼에도 나는 현실을 만지고, 관찰하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있다고 확신하며 살아간다. 눈을 뜨면 그곳에 세계가 있고, 눈을 감으면 내 안에서 더 유동적이고 덧없는 또 다른 세계가 떠다닌다. 안과 밖. 그 어떤 경계도 이보다 더 또렷이 보이고, 이보다 더 넘기 어려운 것은 없다. 이원론은 내가 다른 것의 안에 존재한다는 느낌에서 비롯된다. 종교 또한 이와 같은 원칙을 따른다. 내가 이 몸 안에 갇혀 있는 것이라면 누군가가 나를 여기에 가두었기 때문이다. 내게는 그 어떤 탈출구도 없다. 어쩌면 아우토 데 페, 즉 화형 선고가 마지막 남은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른다. 육신이 다 타버리고 나면 마침내 영혼이 해방될 수도 있을 테니까.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빚어낸 산물이다. 이 세계, 우리가 이렇게 편안하게 돌아다니는 이 공간조차도 결국은 서로 연결된 허구들의 집합체나 다름없다. 우리의 가족 관계, 사랑하는 이들이나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 우리를 지배하는 질서, 우리가 배우고 즐거움을 얻기 위해 찾아낸 방법들, 우리 자신이라는 존재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허구라는 도구로 세워진 것이다. 우리는 허구로, 다른 허구들과 관계를 맺고 심지어 그런 허구들과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우리는 허구적 공간 속에서 살고 일하고 움직인다. 우리는 허구에 유혹당하고 이끌리고 통제될 뿐만 아니라, 허구에 자발적으로 복종한다. 우리는 허구를 갈망하고, 허구를 꿈꾼다. 우리는 허구를 위해 투쟁하고, 때로는 허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한다. 우리는 허구에 감탄하며 시간을 보내고 허구로 인해 괴로워하거나 희망에 가득 차서 기뻐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우리 자신이 허구라는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은 포유류, 영장류, 초기 인류를 거쳐 마침내 인간에 이르는, 생명체를 둘러싼 허구의 기원에서부터 우리가 여전히 전화라고 부르는 휴대용 컴퓨터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허구 이야기를 탐욕스럽게 소비하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개인적인 여정이다. 이 기나긴 여정 속에서 우리는 상상력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우리가 그것이 지닌 힘을 깨달았을 때 어떤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지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건국 신화부터 기성 종교에 이르기까지, 또 초기 부족사회부터 현대 국가에 이르기까지 개인과 집단 사이의 협력을 가능하게 해주는 허구들, 그리고 침략과 전쟁, 학살을 정당화해온 허구들을 살펴볼 것이다. 또한 우리의 가족, 우정, 시민, 성 또는 사랑의 관계를 공고히 다져준 허구들과 마술, 종교, 점성술, 철학, 과학 등 우주에 일관된 의미를 부여해준 허구들도 함께 탐색할 것이다. 신화, 시와 노래, 회화, 그림, 조각, 연극과 무용 작품, 이야기와 소설, 오페라와 발레, 영화와 시리즈, 만화와 비디오게임, 멀티미디어 공연과 퍼포먼스, 또 타인의 마음을 면밀히 관찰할 수 있도록 해주는 회고록과 서간집, 자서전, 소셜 네트워크, 매일같이 우리 자신을 드러내는 사이버 아바타, 그리고 우리의 공적 삶을 은폐, 왜곡하는 허튼소리―가짜 뉴스―에 이르기까지, 수천 가지의 허구를 찾아 떠나는 그 여정 또한, 미리 말해두지만, 허구들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는 침묵이 음악만큼이나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내기 위해 나는 우리의 의식을 가로지르는 시간의 화살을 이용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허구가 반드시 점진적으로 전개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이야기는 결국 인위적으로 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연대기적 순서는―이야기가 종종 불안정한 전자(電子)처럼 불규칙하게 앞뒤로 튀더라도―허구가 어떻게 변화되고 변형되어왔는지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뒤숭숭한 꿈을 꾸다 눈을 떠보니 내가 다시 흉측하게 생긴 벌레로 변해 있다. 그럼 시작해볼까?

호모 픽투스, 상상하는 인간. 호르헤 볼피 지음, 엄지영 옮김

나는 이 변화를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 살펴보기 위해 단행본, 잡지, 신문, 기관지, 구술 채록문 등을 수집하되, 시기별로 미술의 주제·매체·장소 차원에서 감각 실천 확장과 국가검열이 충돌한 사건을 선별하고 분석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 미술이 감각 질서의 경계를 넘어서면, 국가권력은 이를 기존 질서를 흔들 불온한 사건으로 간주하고 검열을 통해 허용 가능한 주제와 표현 방식의 경계를 재설정하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미술이 치안 체계를 교란하고 정치의 국면을 열어젖히는 순간마다 국가는 이를 검열이라는 통치 장치로 복원하려 했으며, 미술은 또 다른 감각 실천을 통해 검열을 벗어나려 했다. 이처럼 감각 실천과 통치 기술이 서로를 구성해 온 관계를 ‘상호구성적’이라 표현할 수 있다.

검열과 월경의 미술사. 홍태림 지음

재회의 순간을 그토록 여러 번 생각했는데, 어째서 지금 여기에 하나도 맞지 않지?

호르두발. 카렐 차페크 지음, 정보라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