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가 "나의 출발점이자 일종의 문학적 영웅"이라 칭한 스콧 피츠제럴드. <어느 작가의 오후>에 실린 그의 후기 작품들은 <위대한 개츠비> 속의 들뜨고 흥청거리는 공기를 풍기지 않는다. 1920년대 뉴욕의 찬란한 호황기를 대표하며 절정에 달한 피츠제럴드의 명성은 대공황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서서히 잊혔다. 성대한 파티의 뒤안길에서 그는 "인생이 낭만적인 것이라는 믿음이야말로 너무 이른 시기에 거둔 성공의 대가이다."라고 쓸쓸히 읊조린다. 황폐한 내면은 예전처럼 "세련되고 도시적인 연애 소설" 같은 것은 쏟아낼 수 없게 되었지만, 깊은 무의 심연을 본 자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를 갖게 되었다.
'나의 잃어버린 도시'에서 피츠제럴드는 뉴욕이라는 한 도시의 흥망성쇠에 비추어 생을 돌아본다. 뉴욕의 모든 것을 동경하며 사랑에 빠졌지만 누추한 현실과의 괴리로 고통받았던 대학 시절부터, 여전히 뉴욕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음에도 갑자기 "시대의 대변자"라는 자리에 올라 얼떨결에 맛본 달콤한 전성기, 화려한 시대의 도처가 유해한 독소로 가득 찼다는 것을 알아차릴 무렵 들려온 거대한 붕괴의 소리,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도시를 잃어버렸음을 깨닫고 작별을 고하게 되기까지.
뒤이은 '망가진 3부작'에서는 오랫동안 많은 것을 실제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좋아하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았다는 깨달음의 순간이 담겼다. 그동안 세상의 욕망을 그대로 투영한 어떤 견고한 환영에 경도되어 살고 있었음을 자각하자 엄청난 충격과 함께 그 욕망은 산산이 부서져 사라진다. 그것은 무한한 자유를 선사하지만 동시에 삶의 추진력도 앗아가버린다. "이제 하고 싶은 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걸 알지만 하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뒤의 절망. 그 기나긴 우울의 끝에서, 사람은 이런 종류의 충격에서는 결코 회복될 수 없으며 그저 다른 새로운 사람이 될 뿐이라는 인식이 찾아오고 "나는 이 새로운 인식과 더불어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다."라는 선언으로 나아간다.
이 두 에세이를 두고 하루키는 "긴 에세이를 쓸 때 나는 언제나 이 작품들을 염두에 둔다."고 말하며 피츠제럴드의 작품에서 글쓰기의 구체적인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한다. 그렇게 하루키가 직접 기획과 편집, 해설과 일본어판 번역을 맡아 세상에 나온 <어느 작가의 오후>가 알라딘 북펀드를 통한 수많은 독자들의 뜨거운 성원 속에서 드디어 출간되었다. "피츠제럴드가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쓴 작품에서 나는 절망을 헤치고 나아가려는, 어떻게든 희미한 광명을 움켜쥐려는 긍정적인 의지와 작가로서의 강인한 본능을 보았다."라는 편집 후기가 수록작과 공명하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 소설 MD 권벼리
엮은이의 말
나는 물론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애호하는 사람이나, 그의 소설에서 어떤 구체적이거나 기술적인 영향을 받았냐고 묻는다면 거의 없다. 정신적인 영향을 받기는 했어도… 그러나 에세이는 어느 정도 구체적인 영향을 받았을지 모른다. 긴 에세이를 쓸 때 나는 언제나 이 ‘망가진 3부작’과 <나의 잃어버린 도시>를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권력과 발언권을 가진 이들이 자신이 가진 것들을 유지하기 위해 약자를 탄압하는 모습을 최근 너무 자주 목격했다. 책의 방향과 결을 예상하고 읽었음에도 왠지 낯설고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지금 한국 사회라는 현실적 배경 때문인 것 같다. 공부의 목적에 인간을 두고, 인간이 소외되는 학문의 한계를 정확히 인지하는 김승섭의 이 책엔 문장마다 합리와 정의가 흐르고 있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이후 6년, 김승섭의 연구는 여전히 고통의 곁에 머문다.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보이지 않는 고통, 수치, 차별을 그는 수치화하고 가시화하여 세상에 던진다. 지식이, 학문이 돈과 시간을 가진 자들을 위해 복무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는 지식의 책임을, 공부의 목적을, 공동체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끈질기게 묻는다.
책은 데이터와 논리로 촘촘한 근거를 갖췄지만 대중 교양서로서 어려움 없이 읽힌다. 타인의 삶과 고통에 관한 학문적 지식이 최대한 널리 퍼지길 원하는 저자의 의도이리라 짐작한다. 따뜻하고 정확하고 곧은 책, 우리의 더 인간다운 삶에 대한 염원을 담은 연말 선물로 제격일 것 같다. - 사회과학 MD 김경영
이 책의 한 문장
사회적 약자들의 싸움에 연대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당사자들의 투쟁을 함부로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연구자는 이미 존재하는 사실관계에 따라서, 그 데이터에 기반해 세상을 이해한다. 그런 합리성은 종종 보수적인 현실 인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역사는 주어진 조건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아니라, 현실의 질서에 도전하며 판에 균열을 만들어 낸 이들이 열어왔다. 많은 경우, 연구자의 언어는 그 변화를 사후적으로 따라갈 뿐이다.
공자의 제자이자 유가의 도통을 이었다는 증자는 “스승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따름입니다.”라고 이른 바 있다. 충(忠)은 중심을 뜻하는 중(中)과 마음을 뜻하는 심(心)이 합쳐진 글자이며, 서(恕)는 같을 여(如)자와 마음 심(心)자가 합쳐진 글자이다. 충(忠)은 나를 주체로 하여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세우는 것이며, 서(恕)는 나의 마음을 다른 타인의 마음과 같이하여 남을 바르게 대하는 것이다. 나를 바로 세우지 않고는 다른 사람을 바르게 대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을 바르게 대하는 사람은 스스로 중심이 바로 선 사람일 수밖에 없다. 나에게서 비롯한 충(忠)이 발현되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서(恕)로 완성한다. 나와 타인, 사람과 세상을 이해하는 지혜는 따로 있지 않으며, 이를 꿰는 원리는 오직 하나에 있다(一以貫之).
2,500여 년 전 공자가 살던 당대의 중국은 주나라 천자의 권위가 훼손되고 나라와 나라 사이, 왕과 신하 사이, 백성과 백성 사이에 끊임없는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고 사람 간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 위기의 시대였다. 이러한 시기에 공자는 지위 여하를 막론하고 자신과 뜻을 함께하기로 한 제자들을 모아 ‘사람다움’에 대한 가르침을 전했다. 그리고 그가 사람들과 만나며 남긴 대화는 <논어>라는 위대한 고전으로 남아 지금까지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다산의 마지막’ 시리즈로 동양고전 읽기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저자 조윤제가 그동안 수없이 언급되고 또 해석되어 왔음에도 <논어>를 다시 꺼내든 이유는, 사람으로 인해 불안하고 사람 때문에 고민인 이들에게 공자처럼 매일 성찰하며 배우는 삶이야말로 사람답게 살기 위한 첩경임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 자기계발 MD 박동명
크리스마스는 일 년 중 설레는 날로 다섯 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아마 설날과 어린이날, 방학식이 그러지 않을까. 소풍 가기 전날 잠을 뒤척이는 것처럼 12월 24일에는 산타가 어떤 선물을 줄지 기대하며 잠이 든다. 이때의 설렘은 변치 않을 감정 중 하나다. 하지만 산타의 유래가 기독교 성인인 성 니콜라오스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는 현재에 12월만 되면 크리스마스와 산타를 당연히 여기는 건 그가 주변 가난한 자와 어린이들에게 베푼 선행을 기억하기 위해서 일 테다.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가 생일인 산타의 아들 실버는 늘 외로운 생일을 보내야 했다. 부모님이 전 세계의 아이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고 배달하는 사이, 실버의 외로움은 점점 커졌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산타가 아닌 케이팝을 부르는 아이돌 스타를 꿈꾸는 실버. 대형 기획사의 오디션을 보기 위해 서울에 온 실버는 자신이 저지른 사건으로 산타 마을을 없애 버릴 위기에 빠트린다. 악으로 가득 차버린 세상, 믿음과 사랑, 희망이 사라진 산타 마을과 세상을 지켜낼 수 있을까? 크리스마스를 사랑하는 여러분 만이 알 수 있다. 2023 황금도깨비상 대상 수상작. - 어린이 MD 임이지
심사평
이 이야기는 선명하고 역동적일 뿐 아니라 쨍하게 반짝이는 눈과 얼음처럼 깨끗하고 시원스럽다. 우리에게도 새로운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생겼다는 즐거움이 압도적이다. - 황선미(동화작가), 강정연(동화작가), 김유진(아동문학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