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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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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 <나비박사 평전 석주명>

이병철

서울이 고향인 이병철은 휘문중고등학교와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75년부터 기자와 글쓰기를 업으로 삼다가 2008년 세계 최초 휴대전화 박물관을 열었다. 2014년 폰박물관을 여주시에 기증한 뒤 2016년 공무원 시험을 치르고 여주시립 폰박물관World First & Only Mobile Museum 관장에 취임했다. 얼마 전 은퇴하고 나서 지금은 모국어 관련 글쓰기에 빠져 지낸다.

1985년 처음 평전 《석주명》(생물학)을 펴낸 뒤로 쓴 책 가운데 몇 가지를 꼽으면
《발굴과 인양》(고고학)
《도전과 모험》 《탐험과 발견》 《세계 탐험사 100장면》 《이누이트가 되어라》(탐험사)
《참 아름다운 도전》(여성사)
《수집가의 철학》(이동통신 역사)
《모국어를 위한 불편한 미시사》(국어학)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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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나비박사 평전 석주명> - 2025년 7월  더보기

석주명(石宙明)은 우리 현대사 초창기의 몇 안 되는 별이다. 특히 자연과학 분야에서 세계에 떨친 그의 업적은 일제 암흑기를 빛낸 눈부신 빛이었다. 그는, 평생 75만 마리가 넘는 나비를 채집하고 측정하여 생물 분류학상 새로운 학설을 제창했고, 외국인들이 독점했던 한국산 나비의 계통 분류를 완성했다. 또 제주도 방언 연구로 국어학계에 귀중한 자료를 남겼고, 평화와 애국 운동으로 에스페란토 보급에 힘썼으며, 산악 활동을 통해 국토 구명과 녹화사업을 벌인 다재다능한 학자였다. 그러나 이 글을 쓰면서 시종일관 나를 사로잡은 것은, 그가 이룩한 숱한 업적보다는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지독한 그의 후천적 노력이었다. 그가 비명에 간 것도, 온 세상이 뒤집힌 전쟁 중에 피난을 가지 않고 연구실을 지킨 결과였다.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여러 가지 특장(特長)과 미덕 중에 ‘노력’이라는 분야에서 이토록 온몸을 내던져 학문에 몰두한 학자가 이 땅에도 있었다는 새로운 발견에 독자들도 마음이 벅차리라 믿는다. 이 글은 차라리 인간이 쏟을 수 있는 피와 땀의 한계를 생각게 하기 위한 데에 더 큰 의의가 있을지도 모른다. 석주명 선생과 같은 시대에 살아 보지 못한 내가, 그것도 전혀 생소한 생물학 분야의 학자에 대한 글을 쓰게 된 동기는, 1966년 고등학교 시절 국어 시간에서 비롯되었다. 나른한 오후, 비유법을 설명하시던 황명(黃命) 선생님이 문득 석주명의 《제주도 수필》 얘기를 꺼내셨다. “우리나라에 세계 제일의 나비학자로 석주명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한번 진귀한 나비를 발견하면 비록 서울서 평양까지라도 밤낮 가리지 않고 뒤쫓아 기어이 잡고야 말았으며, 어학에도 조예가 깊어 제주도 방언 사전을 만들었다”라는 설명을 우리 반 모두는 숨소리도 죽인 채 경청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좀 별다른 사람의 얘기인 까닭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세계 제일의 학자라는 말이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우리의 주눅 든 어깨를 으쓱거리게 하는 자못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황 선생님은 그 이상의 사실을 알려 주시지는 못했는데, 결국 석주명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내 호기심과 당시의 뿌듯했던 감정을 더 구체적으로 되살려 보고 싶었던 바람이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아 있다가 이 글을 쓰게 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한 가지 굳이 덧붙이자면, 우리나라의 전기류(傳記類)가 몇몇 위인들에만 국한해 있는 데다 정치가·군인·독립운동가 등 특정 분야에만 치우쳐, 특히 어린이와 학생들이 식상해하거나 학문적 편식을 초래할 우려는 물론 다른 분야에 대한 민족적 열등감을 갖게 할 수도 있다는 내 나름의 우직한 판단에서였다. 자연과학에 전연 문외한인 국문학도로서 나는 이 글을 쓸 적임자가 못 되는 만큼 어려움도 많았다. 석주명의 학설과 업적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생애만을 약술(略述)하는 글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생물학 관계 서적과 관련 논문들을 찾아 읽고 그 방면의 학자들을 찾아 배웠으며, 주말마다 나비를 채집해 전시판(展翅板) 위에 표본을 만들며 고인(故人)의 흉내를 내보기도 했다. 이렇게 하고도 잘 모르는 문제에 부딪혀 답답할 때면 나는 ‘전문 분야라는 어려움 때문에 기피하고 만다면 과학자의 얘기는 필경 아무도 쓸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거듭 떠올리며 다짐을 새로이 하곤 했다. 그러나 진실로 나를 분발케 한 힘은, 그가 허망한 최후를 맞은 지 40년이 가까운 오늘날, 생물학도들마저도 석주명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허다하다는 안타까움 바로 그것이었다. 나 자신의 부족함과 그밖의 여러 가지 문제점 때문에 본문 내용 중 자료나 증언에 따르지 않고 내 마음대로 쓴 글은 단 한 줄도 없다. 따라서 이것은 내 한 사람의 힘으로 쓰였다기보다는 여러 사람의 증언과 도움, 그리고 석주명 자신의 저술에 의한 결과이다. 물론 이 책이 한 위대한 학자에 대한 종합적인 전기와 인물평이 되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어린 시절·일본 유학 시절 등 생애의 더 많은 부분이 밝혀져야 하고, 그의 유고들이 정리되고 출판되어 더 많은 연구가 잇따라야 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부족하지만 일단 첫걸음을 내딛어 무척 홀가분하다. 이 일을 하는 동안 세계적인 그의 유저(遺著) 《한국산 접류 분포도》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나게 한 것, 그의 《제주도 방언집》을 비롯한 여러 논문·저서들과 미발표 유고인 방대한 《세계 박물학 연표》 그리고 손때와 체취가 어린 스크랩북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것도 크나큰 기쁨이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자료를 제공해 주신 석주선(石宙善) 선생님, 학술 논문을 번역해 주신 은사 서명호(徐明浩) 선생님 그리고 정영호(鄭英昊)·미승우(米昇右)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분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이 책은 태어나지 못했으리라. 끝까지 격려해 준 아내에게 감사하며, 출판해 주신 백우암(白雨岩) 선생께도 고마움을 전한다. 1985년 8월 那卑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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