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에 반한 연인처럼, 한순간 무섭게 빠져들어 열렬히 몰두하는 우정도 있다. 사소하게 멀어져 다신 못 보게 되었다 해도 한때 속을 탈탈 털어놓으며 영혼의 단짝을 자처하던 얼굴 한 둘쯤 누구나 마음속에 있지 않은가. 그런 우정이 그저 나이와 성별뿐 아니라 시대와 신분, 죽음까지도 초월한다면 하는 단상에서 이 소설은 시작되었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죽음이지만 그 과정은 결코 그렇지 않았을 조선시대. 웃전의 심기가 틀어져 종놈 하나 죽어 나가는 게 별스런 일도 아니었을 그때의 죽음을 ‘별것’으로 여기는 인물을 상상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발전되었다. 신분으로 인격을 판단하는 게 무의미함을 온몸으로 증명해줄 이들은, 여상하게 살인을 일삼는 천한 양반과 죽음 앞에서 제 그림자를 맡기는 것조차 망설이는 귀한 쌍놈은 그렇게 탄생하였다. 최대 난관은, 죽음이 그림자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취하는 것이란 걸 그들이 깨달은 순간이었다. 탁영 앞에 머뭇대면서도 꽃나무 밑에 묻히고픈 염원을 공감한 그 찰나 말이다. 슬픈 끝맺음이 내내 맘에 걸리는 건 그런 이유다. 엔딩을 써 놓고도 되레 앞으로 돌아가 굳이 설렘의 순간을 부여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탁영』은 그런 반복으로 쓰였다.
이 소설에 녹여낸 모든 관계는 우정이다. 칼두령과 백섬, 백섬과 복순 어멈, 복순 어멈과 희제, 희제와 행랑아범까지 그 모든 인생은 우정의 생로병사다. 꽃을 주면 내 손엔 향기가 남는 벗의 이야기로 『탁영』이 기억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