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생. ‘순정만화의 레전드’, ‘만화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대한민국 대표 만화가다. 신일숙의 등장은 일대 사건이자 한국 순정만화의 위대한 변혁이었다. 삶의 주인이 된 주인공으로 운명과 맞서는 강인한 여성상을 제시했다. 그렇게 순정만화의 고정관념을 흔드는 새로운 여성 서사를 개척해 나갔다.
《라이언의 왕녀》(1984)로 데뷔한 신일숙은 《아르미안의 네 딸들》(1986)로 대본소 시대를, 《리니지》(1993)로 잡지 시대를, 《카야》(2017)로 웹툰 시대까지 관통했다.
탁월한 이야기꾼 신일숙은 정교하게 설계한 플롯에 화려한 그림체까지 더해 판타지에서 로맨스, SF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거대한 작품 세계를 창조했다. 그중 중세 판타지 《리니지》는 만화 원작 게임화의 세계적인 성공 모델로 꼽힌다.
신일숙 작품 연혁은 작가 삶의 이력서다. 그동안 발표한 수많은 작품이 데뷔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쉼 없이 달려왔는지를 증명한다. 꿈속에서 영감을 얻고, 꿈에서 깨자마자 이야기를 쓴다는 작가한테는 앞으로도 그릴 작품이 줄지어 있다. 꿈꾸는 만화가 신일숙의 꿈은 현재진행형이다.
1990년대 전후의 '순정만화천하' 시절 하면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노말시티>의 강경옥, <바람의 나라>의 김진, <불의 검>의 김혜린, <풀하우스>의 원수연, <점프트리 A+>의 이은혜. 그 시기는 바야흐로 여성만화가들에 의해 평정되었던 시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정도입...
그 시기의 나는 작가로서 창작력이 폭발하던 때였다. 솔직히 말해 《리니지》는 나에게 비교적 수월한 작품에 속했다. 내 그림체와 잘 맞았고, 기승전결이 분명했으며, 시작과 끝이 명확하게 정해진 정통 기사물이기 때문이다. 따로 많은 공부를 할 필요도, 집중을 위해 특별히 준비해야 할 것도 없었다. 평소 좋아하고 관심 있던 분야라 자료도 차근차근 모아 왔기에 표현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저 나는 자신이 있었다.
인터뷰에서 가장 아끼는 작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늘 이렇게 대답한다. “지금 하는 작품입니다.” 이 말은 진심이다. 그만큼 한 작품에 몰두하고, 그 세계에 깊이 빠져 형상화하고, 머릿속을 온통 그 세계로 채운다.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결국 그 세계를 완성해 낸다.
비록 《리니지》가 나에게는 비교적 수월한 작품이었지만, 작가 신일숙이 그저 그런 작품을 독자에게 내놓을 수는 없었다. 그 시대를 가장 잘 보여주고 싶었기에 다른 작품과는 또 다른 결을 선택했다. 흔들림 없이 이어지는 플롯 위에 편안한 연출과 그 시대의 공기를 품은 인간상을 세웠다. 독자와의 공감대를 최우선으로 두었고, 내가 사랑하는 중세 기사 세계의 진짜 멋과 맛을 분명하게 보여주고자 했다. 그것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는 차치하더라도 나는 온 힘을 다했다. 그래서 《리니지》는 나에게 꽤 뿌듯한 작품으로 남아 있다. 만화잡지 시대 속에서 그때의 내가 창작의 불꽃을 마음껏 태워 만든 작품이었다.
《리니지》를 끝내고 나서는 한동안 고대나 중세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힘들어서가 아니라, 시대물 작가로 굳어지는 것을 스스로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안주하면 편하다. 그러나 도전하지 않는 작가는 더는 작가가 아니다.
앞으로 내가 보여줄 다른 작품들이, 이미 형성된 내 팬들에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도 괜찮다. 그 길은 팬들이 받아주든 받아주지 않든 내가 가야 할 길이었다. 받아주면 꽃길이고 받아주지 않으면 가시밭길이겠지만,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어쩌면 이 재능을 내게 준 어떤 존재와의 약속 같은 것이기도 했다.
작가에게 가장 부끄러운 순간은, 그 작품에 끝까지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다. 그뿐이다. 그래서 내게 《리니지》는, 지금 독자들 앞에 다시 내놓아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