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명(石宙明)은 우리 현대사 초창기의 몇 안 되는 별이다. 특히 자연과학 분야에서 세계에 떨친 그의 업적은 일제 암흑기를 빛낸 눈부신 빛이었다. 그는, 평생 75만 마리가 넘는 나비를 채집하고 측정하여 생물 분류학상 새로운 학설을 제창했고, 외국인들이 독점했던 한국산 나비의 계통 분류를 완성했다. 또 제주도 방언 연구로 국어학계에 귀중한 자료를 남겼고, 평화와 애국 운동으로 에스페란토 보급에 힘썼으며, 산악 활동을 통해 국토 구명과 녹화사업을 벌인 다재다능한 학자였다.
그러나 이 글을 쓰면서 시종일관 나를 사로잡은 것은, 그가 이룩한 숱한 업적보다는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지독한 그의 후천적 노력이었다. 그가 비명에 간 것도, 온 세상이 뒤집힌 전쟁 중에 피난을 가지 않고 연구실을 지킨 결과였다.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여러 가지 특장(特長)과 미덕 중에 ‘노력’이라는 분야에서 이토록 온몸을 내던져 학문에 몰두한 학자가 이 땅에도 있었다는 새로운 발견에 독자들도 마음이 벅차리라 믿는다. 이 글은 차라리 인간이 쏟을 수 있는 피와 땀의 한계를 생각게 하기 위한 데에 더 큰 의의가 있을지도 모른다.
석주명 선생과 같은 시대에 살아 보지 못한 내가, 그것도 전혀 생소한 생물학 분야의 학자에 대한 글을 쓰게 된 동기는, 1966년 고등학교 시절 국어 시간에서 비롯되었다.
나른한 오후, 비유법을 설명하시던 황명(黃命) 선생님이 문득 석주명의 《제주도 수필》 얘기를 꺼내셨다. “우리나라에 세계 제일의 나비학자로 석주명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한번 진귀한 나비를 발견하면 비록 서울서 평양까지라도 밤낮 가리지 않고 뒤쫓아 기어이 잡고야 말았으며, 어학에도 조예가 깊어 제주도 방언 사전을 만들었다”라는 설명을 우리 반 모두는 숨소리도 죽인 채 경청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좀 별다른 사람의 얘기인 까닭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세계 제일의 학자라는 말이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우리의 주눅 든 어깨를 으쓱거리게 하는 자못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황 선생님은 그 이상의 사실을 알려 주시지는 못했는데, 결국 석주명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내 호기심과 당시의 뿌듯했던 감정을 더 구체적으로 되살려 보고 싶었던 바람이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아 있다가 이 글을 쓰게 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한 가지 굳이 덧붙이자면, 우리나라의 전기류(傳記類)가 몇몇 위인들에만 국한해 있는 데다 정치가·군인·독립운동가 등 특정 분야에만 치우쳐, 특히 어린이와 학생들이 식상해하거나 학문적 편식을 초래할 우려는 물론 다른 분야에 대한 민족적 열등감을 갖게 할 수도 있다는 내 나름의 우직한 판단에서였다.
자연과학에 전연 문외한인 국문학도로서 나는 이 글을 쓸 적임자가 못 되는 만큼 어려움도 많았다. 석주명의 학설과 업적을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생애만을 약술(略述)하는 글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생물학 관계 서적과 관련 논문들을 찾아 읽고 그 방면의 학자들을 찾아 배웠으며, 주말마다 나비를 채집해 전시판(展翅板) 위에 표본을 만들며 고인(故人)의 흉내를 내보기도 했다.
이렇게 하고도 잘 모르는 문제에 부딪혀 답답할 때면 나는 ‘전문 분야라는 어려움 때문에 기피하고 만다면 과학자의 얘기는 필경 아무도 쓸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거듭 떠올리며 다짐을 새로이 하곤 했다. 그러나 진실로 나를 분발케 한 힘은, 그가 허망한 최후를 맞은 지 40년이 가까운 오늘날, 생물학도들마저도 석주명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허다하다는 안타까움 바로 그것이었다.
나 자신의 부족함과 그밖의 여러 가지 문제점 때문에 본문 내용 중 자료나 증언에 따르지 않고 내 마음대로 쓴 글은 단 한 줄도 없다. 따라서 이것은 내 한 사람의 힘으로 쓰였다기보다는 여러 사람의 증언과 도움, 그리고 석주명 자신의 저술에 의한 결과이다. 물론 이 책이 한 위대한 학자에 대한 종합적인 전기와 인물평이 되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어린 시절·일본 유학 시절 등 생애의 더 많은 부분이 밝혀져야 하고, 그의 유고들이 정리되고 출판되어 더 많은 연구가 잇따라야 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부족하지만 일단 첫걸음을 내딛어 무척 홀가분하다. 이 일을 하는 동안 세계적인 그의 유저(遺著) 《한국산 접류 분포도》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나게 한 것, 그의 《제주도 방언집》을 비롯한 여러 논문·저서들과 미발표 유고인 방대한 《세계 박물학 연표》 그리고 손때와 체취가 어린 스크랩북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것도 크나큰 기쁨이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자료를 제공해 주신 석주선(石宙善) 선생님, 학술 논문을 번역해 주신 은사 서명호(徐明浩) 선생님 그리고 정영호(鄭英昊)·미승우(米昇右)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분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이 책은 태어나지 못했으리라. 끝까지 격려해 준 아내에게 감사하며, 출판해 주신 백우암(白雨岩) 선생께도 고마움을 전한다.
1985년 8월
那卑居에서 - 책머리에
‘취재 뒷이야기’를 보탠 개정 신판에 부쳐
평전 《석주명》을 처음 출간한 해가 1985년이다. 그동안 서너 출판사를 거치면서 용케 판을 거듭해 왔는데, 잊혔던 석주명을 처음 세상에 알린 지 40년이 되는 올해 광문각출판미디어 박정태 대표님 호의와 권유에 따라 ‘취재 뒷이야기’를 보탠 새 판을 내게 되어 감회가 깊다.
글솜씨가 채 여물지 못한 서른셋에 처음 책을 썼으니 돌이켜보면 어눌한 문장과 세심하지 못한 취재 등 여러 가지 아쉬운 점이 많다. 그러나 증언할 사람들이 아직 살아계실 때 세상이 까맣게 잊은 위인을 발굴해 널리 알리고, 그로 말미암아 특히 제주학 분야에서 학자들 연구를 이끌어낸 점은 위안이 된다.
시작은 1979년 6월 한국전쟁 때 유명을 달리한 분들을 추모하는 월간지 특집 기사로 석주명 선생을 선정한 때이다. 석주명에 푹 빠져 취재하다 보니 그 분량이 엄청났다. 기사는 외부 원고로 대신하고 나는 아예 책을 쓰려고 마음먹고 취재를 계속해 1983년 탈고했다.
난생 처음 평전을 쓰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나중에 《윤동주 평전》을 쓴 송우혜 선생이나 김수영 평전 《자유인의 초상》을 쓴 최하림 시인과 얘기해 보니, 그들 또한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가족 친지와 사실을 왜곡하는 사람들 때문에 나처럼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가까스로 탈고하고서도 몇몇 유명 출판사에서 외면당하고, 중학교 동창인 유명 출판사 사장마저 1년이나 원고를 묵힌 것에 분노해 원고를 다시 찾아오는 등 2년을 끌다가 겨우 책을 냈다.
책을 내고서도 어려움은 멈추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석주명 위인전이 출판되었는데 어느 한 책에도 참고 서적과 내 이름을 밝힌 책이 없었다. 심지어 온갖 출판 관련 상은 다 받다시피한 《현산어보를 찾아서》조차 내 책에서 사진과 그래프, 내가 처음 밝힌 이론과 내용을 그대로 싣거나 자기 문장으로 바꾸어 쓰고서도 내 이름이나 참고 서적은 밝히지 않았다.
하도 여러 가지 일을 겪다 보니 책에는 차마 쓰지 못한 얘기를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런 기회가 왔다. 2011년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가 ‘학문 융복합의 선구자 석주명을 조명하다’라는 주제로 석주명 선생 탄생 103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마련했는데, 내가 ‘석주명 제대로 알기 여정을 돌아보다’라는 제목으로 기조 발표를 했다.
대회에 참가한 학자 15명이 발표한 원고를 모아 발간한 책에 실린 내 글은 ‘석주명 연구사 60년’과 ‘석주명 평전 취재 뒷이야기’로 나뉘는데, 나는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들 가운데 네 가지를 취재 뒷이야기에 실었다. 그 일화들을 이 책 중간중간 그 이야기가 해당되는 부분 뒤에 실었다. 평전 내용과 더불어 취재 뒷이야기도 독자에게 솔깃한 읽을거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2025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