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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역사

이름:이상현

성별:남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40년, 대한민국 서울

최근작
2021년 12월 <관자재보살>

다시 쓰는 역사 그 지식의 즐거움

어느 친구가 물었다. “요즘 역사 선생의 전성시대가 온 것 같아! 얼마나 좋겠어?” 요즘 TV에 줄이어 상연되는 사극들을 보거나, 동북공정이니 한일 역사 교과서 문제이니 하는 등 대중매체에서 시도 때도 없이 역사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음을 보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하는 소린 것을 얼핏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대중 사이에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을 역사학도의 한 사람으로 나쁘다 할 이유는 없다. 허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드라마 등 방송매체를 통해서 대중에게 다가가고 있는 이야기들을 과연 역사라고 해야 할지, 그리고 중국이나 일본과 현안으로 제기되고 있는 역사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생각해보면 그렇게 쉽게 가늠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역사’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들이 역사문제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그들 나름의 자유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말이 그렇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인가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사람이면서도 막상 사람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답하기 어렵고, 답을 하려면 여러 방면의 지식을 동원해서, 심지어는 관념적인 철학이나 구체적인 의학적 지식까지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고도 논쟁이 일면, 각각 관심과 이해관계에 따라 다른 주장들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런데 역사의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논란에 직면해 있는 오늘, 한국의 지식인들은 과연 역사를 얼마나 정확하게 인식하고 이해하고 있는가? 역사를 정확하고 깊이 있게 이해하고 인식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필자는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학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의문을 풀기 위해서 무려 40여 년간 연구와 강의를 해왔다. 일반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적인 저서도 몇 권 출간하였다. 그러고 나니, 막말로 본전 생각이 났다. 홀로 상아탑이라는 골방에 묻혀 연구해 놓은 것을 아무도 읽어주지 않으니 허탈하기도 하고, 혼자 좋고 혼자 즐거워 행한 일이라 자위를 하다 보니, 사회에 대해 미안하고 죄스러운 느낌도 들었다. 그래서 근래에는 이러한 연구 실적을 어떻게 하면 대중화시킬 수 있을까, 해서 그 길을 모색해 보았다. 그러나 학문의 대중화란 연구나 강의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1993년 《역사로의 입문》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그러나 의욕은 앞섰으나, 짜임새나 내용에 있어서 많이 서툴고 부족하였다. 때문에 2002년에는 전폭적인 수정과 가필을 해서 출판사 일송미디어를 통하여 《역사, 그 지식의 즐거움》으로 다시 출판하였다. 이것은 강의를 통하여 많은 수강생도 얻었고, 동시에 나름대로 독자도 확보하는 실적을 올렸다. 그리고 최근에는 절판이 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힘을 얻은 필자는 역사의 대중화 작업의 일환으로 세종대학교 출판부에서 《역사 속 사랑 이야기》를 출간하였다. 제목이 좋았음인지,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세종연구원에서 필자의 책을 냈으면 한다고 했다. 여기서 《다시 쓰는 역사, 그 지식의 즐거움》의 개정판이 그 빛을 보기에 이른 것이다. 그 후에도 이 책은 꾸준히 독자들의 관심과 지지를 받아 왔다. 그러던 중, 세종 사이버대학교에서 교양과목으로 강의되기 시작하면서 많은 수강자들의 구독에 힘입어 개정판이 절판되는 행운을 맛보게 되었다. 바로 이때에 도서출판 삼화에서는 저자의 저서 10여 권을 전자책으로 만드는 동시에 〔현곡문집〕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종이책으로도 출판하였는데, 이 책도 그 일환으로 재개정판으로 새롭게 출판되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필자의 눈으로 보면, 책은 언제나 부족하고 불만스럽다. 그래서 이 책도 재판이 나오기까지 틈만 있으면 수정과 보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만족할 수는 없다. 그래서 앞으로도 판이 바뀌는 대로 더 보완하고 수정을 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선후배 사학자들과 독자들의 질정이 있기를 바란다. 2017년 8월 북한산 밑, 현곡재(玄谷齋)에서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다

필자가 1965년 석사학위논문으로 <크로체의 역사사상>을 써서 서양사학회에서 발표했을 때, 서울의 한 유명대학의 교수님이 그런 것을 연구해서 무엇 하느냐고 물었다. 해서 나는 “인생을 왜 사느냐?”고 되물었다. 그처럼 당시 한국 사학계의 형편은 역사 이론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진실한 역사는 현재사이며, 역사학은 철학과 동일하다”는 주제를 들고 학계에 진출한다는 것은 만용에 가까웠다. 그러나 필자는 ‘독불장군’이라는 아름답지 못한 별명을 얻어가며, 온갖 외로움을 극복해야 하는 외길을 걸어 오늘까지 왔다. 그 길을 걸으며 컬링우드를 붙잡고 씨름도 해보았고 비코에게로 달려가서 호소도 해보았다. 그러면서 데카르트나 칸트, 헤겔, 그리고 랑케 등의 유명 사상가들의 발자취도 더듬어 보았다. 그 결과 《자유-투쟁의 역사》, 《역사 철학과 그 역사》라는 저서들을 내는 만용을 부렸고…. 그러면서 나의 정신세계를 다져왔다. 그 결과 1985년에는 이러한 공부들의 종합으로 논문 <신이상주의 역사이론 연구>을 써서 박사학위를 얻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 책은 이 논문을 단행본으로 출판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사학계에서 비코나 크로체 컬링우드라는 역사철학자들의 이름은 생소하였다. 그로부터 3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방면의 연구자들이 속출하여, 혹자는 비코를 연구하여 그와 헤르더를 연결시킨 저서의 번역본을 내어 놓았고, 혹자는 컬링우드의 본고장인 옥스퍼드에서 컬링우드로 박사학위를 받아 온 학자도 있게 되었다. 한마디로 이 기간에 한국 서양사학계에는 역사사상사의 훈풍이 불었다. 이런 분들의 활동과 이러한 연구 분위기를 보면서, 본 필자는 보람도 느꼈고, 한국 인문학분야의 발전에 대한 희망도 가져 보았다. 그런데 본 필자의 나태와 과문의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뒤의 이 분야의 연구 활동에 대해서는 특별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아니 차라리 한국 인문학의 쇠락이라는 어휘들이 더 날카롭게 귓전을 울려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몇몇 인기강사들이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이름을 떠 올리고 있지 않으냐? 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대중 인기몰이를 위한 달변가들의 연기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고, 진지한 연구자의 진실을 읽기는 힘이 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물론 인기강사들의 경향성이나 지식의 전문성에도 있겠으나, 대중 매체의 속성이라는 커다란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이다. 이들이 아무리 훌륭한 지식을 가지고 임한다 하더라도 시청자들에게 재미가 없으면,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의 인기에 영합하려다 보면, 일종의 연예활동이라는 범주를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칸트나 헤겔이 그들의 철학을 강의하던 시절, 그 강의를 듣기 위해 전 독일은 물론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까지 청중이 몰려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 곳은 대중 강론장이 아니라 대학 강단이었다. 대학 강당에 모여든 이들은 대중심리나 파한(破閑)의 수단을 찾는 이들이 아니라, 진지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진리와 진실을 찾아 나선 이들이었다. 물론 당시 대학이란 곳은 시청률을 계산해야 할 이유도 없었고, 수강생들의 호주머니를 들여다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때문에 이 당시 강사들은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려는 의도를 가질 수도 없었다. 한마디로 서양에서 정신세계에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현대의 비약적 발전을 이룩하게 된 17~18~19세기는 대중들이 진리에 목말라 하는 풍조가 있었고, 이에 대응한 위대한 정신을 지닌 문(文)?사(史)?철(哲)의 인문학 학자들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현재는 매스미디어가 인간의 영혼을 앗아가고 있다. 심지어 오늘의 인간 군상을 지칭하여 스마트 폰에 영혼을 빼앗긴 스몸비족(Smombie 族), 스마트폰 때문에 머리를 숙이고 사는 저두족(低頭族), 컴퓨터에 머리가 끌려들어가 목이 앞으로 늘어난 거북목의 군상들이 현대인의 모습이다. 이러한 시대에 골치 아픈 역사철학이야기를 글로 써 낸다는 것은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행위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학문의 전당이어야 하고 상아탑으로서 진리를 연구하여 창의적이고 고급 지식정보를 생산해내야 할 대학마저도 매스미디어를 따라서, 신자유주의의 첨병으로서, 돈을 벌기 위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는 괴물로 변모하여 가고 있는 상황에서, 역사철학을 논의한다는 사실자체가 망상적인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러한 아이티(IT)의 세계지배가 어디까지 갈 것인가? 결국에는 인공지능의 인조인간이 그것을 만들어놓은 본래인간을 능가하는 지경에까지 이를 것인가? 하기야, 지난번에 한국 바둑계의 천재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바둑 전에서, 이세돌이 패배하였다는 사건은 곧 인조인간의 세계지배를 점칠 수도 있게 했다. 해서 사람들은 귀납법적 방법론에 입각한 인간의 지배권은 인조인간에게 넘겨야 된다는 가상세계를 생각하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었다. 아니! 생각 정도가 아니라, 우리는 현재 그들에 의해서 생존권의 위협을 당하고 있다. 각종 기계설비 공장으로부터 로봇에 의한 노동자들의 퇴출은 이미 일상사가 되었고, 한 때, 신이 내린 직업이라 호황을 누리던 은행원들의 수효가 급감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실감하고 있다. 대학에서도 사이버 강의를 해서 교수들이 일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이미 오래된 일이다. 그런데 이것이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의료 정보지식과 의료기계를 활용하여 치료를 하는 의사들, 육법전서의 지식과 과거에 시행된 재판 사례들에 대한 지식을 근거로 판단하는 검사 판사 변호사 등 법조계의 일들, 통계학적인 확률에 근거한 일체의 사회과학적 정보지식? 쉽게 말해서 인공지능에 입력될 수 있는 일체의 지식을 근거로 하는 인간의 고급 직업들은 모두가 알파고에게 넘겨주어야 한다는 가상이 인간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이다. 이대로 인공지능이 발전하고 확대된다면, 본래의 인간들은 거의 모든 일자리를 인조인간 알파고에게 빼앗겨야 될 것이고, 그러다보면, 출산율이 줄어들고 본래인구는 줄어들 것이다. 수요공급 원칙에 또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지구는 수없는 알파고를 소유한 몇몇 대자본가들과 그들과 결탁한 몇몇 정치? 권력자들이 복지정책이라는 듣기 좋은 이름으로 베풀어 주는 동냥으로 연명하고 살아가는 실업자의 수용소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인조인간에게는 아직 영혼이나 정신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에 의해서 이미 창출된 사항들에 대한 정보의 수합과 종합판별 능력, 즉 귀납법적 사고력은 있어도, 연역적 방법론에 속한 사고력을 지닐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체적인 느낌이나 사색을 통한 새로운 지식정보를 창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술가나 시인의 직관적이고 창조적인 감각이나 철학자의 창조적인 추리력까지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알파고의 세계에서 알파고를 능가할 수 있는 분야는 예술가나 시인 철학자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F.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안다 는 것이 무엇인가? 지금까지 이를 영어의 ‘knowledge’로 이해하여 ‘Knowledge is power’라고 외웠는데, 이는 다시 생각해야 하는 문자해석이다. 논리학에서 귀납법을 근거로 하여 수합한 지식은 ‘Knowledge’가 아니라, ‘lnformation’, 즉 정보지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귀납법적 정보지식은 이미 창조된 사실사건들에 대한 소식일 뿐이다. 쉽게 말하면, 컴퓨터에 입력되어 있거나 입력되어야 할 지식이다. 이러한 지식정보에 있어서는 인간 개인이 컴퓨터를 능가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세돌 9단이라는 인간개인이 지금까지 있어 본적이 없는 새로운 바둑을 연구하여 알파고에게 도전한다면 몰라도, 기왕의 기보(棋譜)들을 통틀어서 익히는 수준으로는 승리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제 알파고를 이길 수 있는 것은 Information, 즉 지 식정보가 아니라, Knowledge, 즉 컬링우드가 말하는 “역사적 인식(認識)”이다. 이 책은 역사적 인식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역사적으로 풀어간 책이다. 데카르트의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서양 근대사상의 출발점에서 비롯된 사물, 사건사실들에 대한 절대주의적 인식론과 이에 대항한 비코의 상대주의적 인식론을 근거로 하는 역사적 인식론의 대결과정을 그린 책이다. 그리고 컬링우드에게서 역사적 인 식, 반성적 인식이라는 새로운 Knowledge(認識)의 개념을 표출해 낸 저서다. 여기서 얻어낼 수 있는 결론은 이제 알파고에 의한 정복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반성(Reflection)과 명상(Meditation)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직관적이고 명상적 인식뿐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청년시절 크로체를 알게 되면서부터, 자유를 이해하기 시작하여 그로부터 50여년이 지난 현재에까지 자유라는 화두를 놓아본 적이 없다. 그런데 자유란 무엇인가? 크로체는 현재 주어진 상태로부터 탈피하여 극복하기 위한 정신의 작용으로 이해하였다. 제국주의자들의 착취를 당하던 시대에는 이들로부터 해방을 얻기 위한 투쟁이 자유의 목표일 것이며, 자본주의가 인민을 노예화시키러 덤벼든다면 그것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에 우리 앞에 주어진 자유투쟁의 대상은 무엇인가? 이제는 제국주의나 식민주의 공산주의가 문제로 되지 않는다. 현재는 총체적인 인류의 삶을 통째로 삼키려 덤비고 있는 과학만능, 물질만능의 사상이다. 자본축적과 확대에 광분하는 자본 만능, 물질 만능 과학만능이 지금 인간 말살을 획책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의 발전과 그로 인한 문명의 발달, 그리고 경제적 풍요가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긍정할 수 있으나, 국민생산 지표나 국민 경제지수가 높아, 문명이 발달한 나라의 국민일수로 행복지수가 낮아졌다는 사실도 또한 간과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편리라는 것은 단기적인, 감각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편리는 조금 시간이 지나면 더 편리한 것을 찾아 헤매게 만든다. 이러한 편리주의는 결국 긴 시각으로 볼 때, 인간의 종말을 예견하게 만든다. 문명의 쓰레기가 그것이다. 문명의 쓰레기는 지구를 오염시켜서 지구의 멸망을 촉진시키고 있다. 핵무기의 개발, 우주공간을 놓고 행하는 무한경쟁, 이산화탄소의 배출, 해양과 우주공간의 쓰레기 등등 지구의 종말을 예고하는 징조를 알파고의 힘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재적 과제다.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현재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을 척결하려는 정신의 노력, 즉 자유의식의 발로뿐이다. 이제 인류의 과제는 물질적 창조와 그 생산 확대가 아니라, 인간 본성, 영혼이 있는 인간의 재생이다. 한마디로 정신을 다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물질에 노예가 아닌 정신을 지닌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찾아야 한다. 이것은 반성적 삶과 명상적 삶, 물질을 초월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삶을 향하여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인간이 무엇인가를 재음미해야 할 시기에 이른 것 같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정자와 난자가 우연히 만나 시작된 자연적 생명이 이 세상에 나와서 그저 먹고 마시고 생식하는 자연적 욕망에 이끌려 성장하고 늙어서 죽어버릴 그런 생물체의 일종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닌 존재인가? 전자라면 인조인간 그 이상일 수 없다. 후자라면 인조인간에 의한 지배체제 속에서 순응하며 살수는 없다. 그런데 현대인의 대부분은 전자에 속한다. 먹고 마시고 생식하고. 이런 조건들의 충족을 위하여 기계의 노예가 되어 있다. 이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이것이 현재 인류에게 주어진 과제다. 이것은 현 인문학의 과제이며 현 세계에 대한 도전이다. 독자들 중 단 한사람이라도 이 문제를 인식하고 고민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책의 개정판을 내어 놓고자 한다. 이 책의 개정판을 만들어주겠다고 나선 도서출판 삼화 사장님과 직원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2016년 8월 5일 북한산 밑 현곡재에서

역사는 언제나 다시 써야한다

로봇의 지배가 다가오는 시대에 왜 이 글을 쓰는가? 얼마 전, 나는 친구가 심장박동기를 달았다는 말을 듣고 놀라워했다. 인간이 드디어 로봇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리뼈가 부러져서 쇠붙이로 만든 인공관절을 만들어 끼웠다는 소릴 들었을 때 만 하더라도, 그저 그렇게 하면 편리하겠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했는데, 심장박동기를 달았다는 말에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간의 심장이란 것이 무엇인가? 인간 생명의 근본이 아닌 우리는 심장의 마음 심(心)자를 마음이나 정신의 근본으로 생각하고 희노애락의 사단칠정의 근원이 아니던가? 헌데 그것을 기계로 움직이게 한다니, 결국 인간 감성이나 이성까지도 기계로 좌우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인간은 기계인가? 인간인가? 그런데 몇 일전 알파고가 세계적 천재 바둑기사 이세돌 9단을 4대 1로 격파하였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이를 보고 매스컴은 컴퓨터가 인간의 지능을 능가하는 순간을 가리키는 사건이라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이제 역사는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계에 의해서 이끌어져 가는 시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동차 기사는 사라지고, 더 나아가서는 검사 판사 변호사 등 법률가들, 그리고 의사들과 같은 규정이나 통계와 같은 기존 정보지식을 근거로 하는 인간의 직업은 알파고에게 넘겨야 할 시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다가는 결국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놓은 인조인간의 지배를 받아야 되는 시대가 찾아올 것이라는 이야기가 단순한 기우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디로 갈 것인가?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 보면, 그렇게 우려할 일은 아닌 듯하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밝혔을 때, 사람들은 모두가 지구 밖으로 떨어져 죽지 않을까 하여 두려워했다. 그리고 제임스 와트가 증기관을 만들고 방적기 방직기가 돌아가면서 매뉴팩처체제가 붕괴되는 산업혁명이 일어나 실업자가 거리로 몰려나올 때에는 모든 인간이 기계의 노예가 되어 죽어갈 것이 아닌가 하여 기계를 파괴해버리자는 러다이트 운동까지 펼쳐졌었다. 그리고 1930년대에 미국에서는 경제공항이 일어나 미국 실업자들이 거리를 메우게 되었을 때도 말세가 다가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새로운 교육을 위한 신교육학, 새로운 역사인식을 위한 신사학, 새로운 과학을 통한 시대의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신과학을 부르짖으며, 팍스-아메리카나의 세계 지배권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인간이 매 시대마다 그들이 발견-발명한 지식과 과학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었던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지혜의 발전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루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 결과였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 앞에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뇌하고 연구하다보면 현재의 문재를 극복하고 뛰어 넘을 새로운 방안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를 지탱해오고 발전시켜온 원동력인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인간의 지적 변혁의 과정을 역사적 상대주의라는 이름으로 이해하고 있다. 상대주의란 자유주의다. 인간의 정신을 자유로 이해하는 생각이다. 이 생각에 따르면 인간은 언제나 자기 앞에 주어진 난관을 인지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보다 좋고 아름답고 높은가 있는 것을 찾아서 행군해가는 정신의 추진력이다. 이 책은 1930년대 미국의 역사적 상대주의가 어떻게 미국사상 최대의 위기였던 대(大)공황을 극복하고 세계 최강의 국가로 발전시킨 사상적 배경이 되었는가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이 책의 초판은 대한민국 학술원의 추천도서가 되는 영관을 누린 책이다. 이 점에서 초판을 발간해 준 집문당의 임경환 사장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초판이 나온지 15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책을 다시 세상에 햇빛을 보게 해 준 도서출판 삼화의 사장님과 직원 여러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2016년 북한산 밑 현곡재에서

종교, 그 벽을 넘어 진리의 세계로

예수는 기독교도가 아니고 석가는 불교도가 아니었다. 흔쾌히 죽어가자. 깨치면 우린 모두가 ‘하나’님이니. 그렇다! 아마 예수가 오늘날 부활을 한다면, 마치 그가 생전에 할렐루야를 외치며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여 시장바닥 같은 성전을 쓸어버리며, 그곳에서 행세하고 있던 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외치던 심정을 그대로 느낄 것이 분명하다. 석가모니도 마찬가지다. 만약에 석가모니가 다시 태어난다면, 그는 화려한 거대 사찰을 버리고 깊은 산간 토굴 속으로 들어가 좌선을 할 것이다. 예수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대상이지만, 그 자신은 기독교인이 아니었고, 석가모니는 불상이 되어 신앙의 대상이 되었어도, 그 자신은 불교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참 신앙인이 되려면 스스로 예수가 되고, 부처가 되어 신과 진리를 만나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앙을 위해서 우리 모두 흔쾌히 죽어가자! 깨치면 모두가‘하나’님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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