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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강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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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Let's Go 호세아>

성막을 말하다

부교역자 시절, 제 설교를 유난히 좋아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설교가 일정 분량 모이면 그때마다 마스터인쇄로 제본을 해주셨습니다. 청년회 수련회 때 성막을 강의한 적이 있는데, 그것도 그렇게 만들어주셔서 친구들한테 한 권씩 나눠줬습니다. 마침 친구가 사역하는 교회에 출판사를 운영하는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교역자실에서 우연히 그것을 보시고는 책으로 내고 싶다고 연락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 첫 번째 책 <쉽게 보는 어려운 성막>이 나왔습니다. 책으로 나온 것은 1999년이지만, 원고는 1997년에 작성한 것입니다. 당시 저는 신학대학원을 갓 졸업한 전도사였습니다. 그런 제가 성막에 대해서 무엇을 알았을까요?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닌 모양입니다. 사실 성막을 잘 알아서 강의를 했다기보다 성막을 잘 몰라서 강의를 했다는 말이 맞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성막 때문에 골치를 앓았으니 차라리 강의를 하면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일종의 배수진을 친 것이었습니다. 30년 가까이 지났습니다. 문득 문득 “아! 그게 아닌데 잘못 얘기했구나.” 싶은 대목들이 떠올랐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라는 욥 23:10 말씀을 욥의 신앙고백으로 잘못 설명하기도 했고 (지금도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 말씀입니다.) 언약궤를 옮기던 중에 웃사가 죽은 얘기도 잘못 설명했습니다. 흔히 언약궤에는 십계명 돌판과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습니다. 성막을 강해하면서 대제사장 의복을 빠뜨린 것도 서운했습니다. 개정판을 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 지는 꽤 되었습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손을 댔는데 고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쉽게 보는 어려운 성막>은 성경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내용입니다. 다분히 유치합니다. 다듬어야 할 곳이 생각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개, 보수를 하려고 손을 댔다가 리모델링을 한 격일까요? 그래서 제목도 바꿨습니다. 지난 1997년의 청년회 동계 수련회가 갑자기 생각납니다. 12시 넘은 시간까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강의를 듣던 청년들이 50대 중년이 되었을 만큼 시간이 지났습니다.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무엇보다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부교역자 시절, 때마다 제 설교 원고를 제본해주셨던 이동성 장로님과 김은실 권사님께 이 지면을 빌려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그 덕에 제가 지금까지 스무 권 넘는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감사 인사가 늦은 점이 송구합니다. 출판을 위해 애쓰신 베드로서원 방주석 장로님과 정진혁 부장님, 그리고 베드로서원 가족들에게도 깊은 감사를 느낍니다. 이 책을 읽는 모든 분들께 성막을 통해서 제가 깨달은 은혜가 그대로 전달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두 손을 모읍니다. 주후 2025년 11월 하늘교회 목사 강학종 - 머리글

아는 사람 믿는 사람

“예수는 단순하게 믿는 게 제일 좋은 거 아닌가요?” “단순하게 믿는 게 어떤 건데요?” “그냥 믿는 거죠. 이것, 저것 따질 것 없잖아요.” “뭘 믿는데요?” “예수님을 믿죠. 하나님도 믿고요.” “예수님이 어떤 분인데요?” “그걸 왜 따져요. 그냥 믿는데…” 예전에 어떤 분과 주고받은 대화 내용입니다. 비단 그때만이 아닙니다. 교리라는 말만 들으면 질겁하는 교인을 한두 번 본 게 아닙니다. 심지어 그런 것을 따지지 말고 그냥 믿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 양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믿음이려면 믿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믿는 대상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채 무조건 믿는다는 말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일단 객관적이어야 합니다. 자기 혼자 열심 내기 이전에 자기가 열심 내는 대상을 알아야 합니다. 이게 안 되면 신앙을 자가 발전하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분별의 문제가 아닌 열심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이 대표적인 오류입니다. 하나님은 전혀 관심이 없는 문제에 자기 혼자 바락바락 악을 쓰며 “믿습니다!”를 연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안타까움이 전부터 있던 차에 <아는 사람 믿는 사람>을 펴내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늘 쓰는 용어인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교회, 구원, 예배, 믿음, 기도, 주일을 나름대로 쉽고 깊게 설명했습니다. 또 권말 부록으로 절기를 다뤘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요체가 구원인데 대부분의 교회에서 구원과 무관하게 절기를 지키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흔히 추수감사주일을 1년 동안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날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성경에 없습니다. 모쪼록 이 책이 우리 신앙을 객관적으로 정립하는 데 한 조각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잃어버린 400년

성경을 창세기부터 차례로 읽으면 말라기 다음에 마태복음을 읽게 됩니다. 말라기로 구약이 끝나고 마태복음으로 신약이 시작됩니다. 그 사이 기간을 ‘신구약 중간 시대’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보다 마가복음이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면 말라기부터 마가복음 사이의 기간이 신구약 중간 시대인데, 성경 배열 때문에 말라기부터 마태복음까지를 신구약 중간 시대라고 하는 것일까요? 예전에 누군가 물었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는데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그때 “세례 요한이 구약에 속한 사람이야, 신약에 속한 사람이야?”라고 반문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신약성경에 등장하지만, 구약에 속한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1-33).” 새 언약(신약)이 있으면 옛 언약(구약)도 있을 것입니다. 신약, 구약이라는 말이 이 본문에서 유래했습니다. 옛 언약은 출애굽 때 맺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습니다.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남편입니다. 자기 자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새 언약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이스라엘의 속에 두고, 이스라엘의 마음에 기록합니다.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말합니다. 즉 오순절 성령 강림부터가 신약입니다. 그러면 얘기가 이상하게 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을 기준으로 구약과 신약을 나누면 흔히 말하는 신구약 중간 시대는 존재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신구약 중간 시대는 실제로 존재하는 기간이 아니고 편의상 정한 기간입니다. 말라기를 끝으로 하나님이 더 이상 선지자를 보내지 않으십니다. 세례 요한이 나타날 때까지 무려 400년을 침묵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요? 이스라엘이 남 왕국과 북 왕국으로 갈라진 다음에 북 왕국은 앗수르에게 망하고 남 왕국은 바벨론에 망합니다. 한때 앗수르가 중근동의 패자였고, 이어서 바벨론이 중근동의 패자가 됩니다. 하지만 영원한 제국은 없습니다. 바사, 헬라, 로마가 그 뒤를 잇습니다. 그러면 이어서 느부갓네살이 본 환상처럼 손대지 않은 돌이 나올 차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 작업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 선지자를 보내는 대신 세계 역사 흐름에 개입하셔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울 준비를 하신 기간이 신구약 중간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셨다고 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찬양 예배 시간을 통해서 십여 주 동안 신구약 중간사 특강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선포되지 않는 중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이 이 세상 역사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세움북스 강인구 장로님으로부터 신구약 중간사 책을 쓸 수 있겠느냐는 말을 듣고는 그때의 기억만으로 선뜻 쓸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역사신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제가 무슨 배짱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자고로 무식하면 용감한 법입니다. 깊이 있는 내용을 쓸 생각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능력도 없습니다. 그런 책은 전공자에게 맡기면 됩니다. 저는 성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옛날이야기처럼 쓰려고 했습니다. 원고를 쓰다 보니 문득 신구약 중간사 특강을 할 때 교인들이 어려워했던 생각이 났습니다. 누가 누구인지 구별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보니두스가 어떻고, 아스티아게스가 어떻고, 하르파고스가 어떻다고 하는데, 그들의 행적이야 들으면 되지만, 죄다 처음 듣는 이름이니 내용이 제대로 정리가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매 단원에 주요 등장인물을 수록했습니다. 역사는 어차피 인물 중심으로 기술되게 마련입니다. 이름이 낯익으면 내용을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것입니다. 출판의 기회를 주신 강인구 장로님과 세움북스 가족들, 책이 나오도록 산파의 역할을 한 정민교 목사님, 그리고 기꺼이 추천사를 써주신 김관성 목사님, 박종철 목사님, 장동학 목사님, 조충만 목사님, 최성욱 목사님께도 이 지면을 빌려 고마움의 뜻을 전합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마다 이 세상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후 2024년 5월 하늘교회 목사 강학종 - 머리말

LET’S GO 로마서 - 하

신약성경 27권 중에 바울이 쓴 책이 무려 13권입니다. 그중에서 로마서를 가리켜 기독교 교리를 가장 잘 설명한 책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른 서신서들은 바울과 관계가 있는 교회나 개인에게 보낸 것인데 반하여 로마서의 수신자인 로마교회는 바울과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갈라디아교회를 세웠는데 갈라디아교회에서부터 별로 반갑지 않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갈라디아교회에 율법과 복음에 대한 갈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어떤 내용을 말해야 할까요? 당연히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설명해야 합니다. 기독교 교리 전반을 얘기할 여유가 없습니다.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세운 고린도교회에 분파, 우상, 간음 등의 여러 병리적 현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 서신을 보내면서 주로 그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로마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더구나 바울은 로마교회를 방문하고 싶어 하면서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평생 로마교회를 방문해 보지 못하고 그의 사역이 끝날지도 모릅니다. 이런 바울이 로마교회에 편지를 쓰려니, 자기가 아는 기독교의 전반적인 내용을 전부 다 쏟아 놓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로마서를 가리켜서 기독교 교리의 중심이 되는 책이라고 합니다. 이런 때문인지 많은 설교자가 로마서를 강해하고 싶어 합니다. 신구약 성경에서 책 하나를 택해서 강해하라고 하면 대부분 로마서를 택하지 않나 싶습니다. 저 역시 부목사 시절에 청년회 성경 공부를 인도하면서 로마서를 강해한 적이 있고, 교회를 개척하고 20년 목회하는 동안 찬양예배 때와 수요예배 때, 그리고 주일낮예배 때 각각 한 번씩 로마서를 강해했습니다. 부목사 시절의 일입니다. 청년회에서 회지를 발간하면서 저한테 원고를 부탁하기에 어떤 내용을 쓸까 하다가 로마서 강해를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종종 들었는데 사실 성경은 읽으면 읽은 만큼 알 수 있는 책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성경 내용이 읽는 대로 머리에 쏙쏙 들어오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한 절씩 최대한 쉽게 풀어서 썼습니다. 그리고 그때 할 수만 있으면 신구약 성경 66권을 전부 풀어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앞에 나온 <거룩한 에로스 아가>와 가 그런 책입니다. 여기에 실린 내용은 지난 2009년 1월부터 2011년 5월까지 2년 4개월 동안 주일낮예배 때 설교한 내용을 간추려서 정리한 것입니다. 그때 매일 새벽기도를 마치면 로마서를 1독 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내용의 방대함으로 1장부터 8장까지 상권, 9장부터 16장까지 하권으로 나누어 발행하였습니다. 아울러 책을 읽는 모든 독자에게 제가 로마서를 통하여 받은 은혜가 그대로 전달되기를 소망합니다. 강학종 목사

LET’S GO 야고보서

한 나라의 언어를 다른 나라의 언어로 옮기면 의미가 손상되게 마련입니다. 오죽하면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사극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를 영어로 옮기면 “Thank you”입니다. “황공무지로소이다”는 “I am sorry”입니다. 도무지 같은 뜻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그것이 언어 현실입니다. 저는 데모가 끊이지 않던 시절에 대학에 다녔습니다. 대학가에는 반미 감정도 상당했습니다. 당시 워커 주한 미국 대사가 “지나친 내셔널리즘은 양국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 때문에 반미 데모가 더 격화되었습니다.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요? 한 재미동포 작가가 워커 대사가 말한 내셔널리즘과 한국인이 생각하는 내셔널리즘은 같은 뜻이 아니라는 칼럼을 썼습니다. 내셔널리즘에 해당하는 우리나라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말을 민족주의로 번역하는데 내셔널리즘과 민족주의는 뜻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미국은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쪽이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내셔널리즘은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대입니다. 우리나라가 이민족의 공격을 받은 횟수가 931회라고 합니다. 다른 나라를 지배한 적은 없고 지배를 받기만 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배격하는 쪽으로 민족주의를 말합니다. 한쪽에서는 다른 나라를 지배하려는 것을 내셔널리즘이라고 하는데 그 단어를 민족주의로 번역해서 자기 나라를 보호하려는 것으로 얘기하면 대화가 제대로 될 리 없습니다. 역사적인 배경이 다른 때문입니다. 야고보서는 흔히 행위를 강조한 책이라고 합니다. 교회에서는 늘 이신칭의를 말하는데 무슨 영문일까요? 오죽하면 루터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아닌 행위를 말하는 것이 상당히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입니다. 믿음은 히브리어 ‘에무나’를 번역한 말입니다. <70인역>에서는 ‘피스티스’로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에무나가 믿음이고 헬라어로는 피스티스가 믿음입니다. 그런데 둘의 뜻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헬라는 철학이 발달한 나라입니다. 사유와 성찰을 중시하는 풍조가 있으니 언어도 다분히 사변적입니다. 피스티스도 지적 동의를 뜻합니다. 어떤 사실에 대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피스티스입니다. 우리말 ‘믿음’도 다분히 그렇게 쓰입니다. 반면에 에무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적 동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행동을 수반합니다. 전인격적인 반응을 말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싸운 적이 있습니다. 모세가 기도를 하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기도를 쉬면 이스라엘이 지다가 아론과 훌이 모세 양옆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려서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게 하는 것으로 결국 이긴 전투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았다”라고 할 때 우리말 ‘꾸준하게’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가 번역이 안 되었습니다. 바로 ‘에무나’입니다. 모세의 손이 꾸준하게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요컨대 히브리 사람들이 생각하는 믿음은 꾸준한 순종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서도 믿음을 피스티스의 의미로 생각하는 풍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급기야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일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런 야고보가 쓴 서신을 가리켜서 행위를 강조한 책이라고 하는데 차라리 왜곡된 믿음을 바로 설명한 책이라고 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야고보가 이해한 믿음이라고 해서 바울이 이해한 믿음과 다를 수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바로 이해하고 있을까요?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모쪼록 이 책이 믿음을 바로 이해하는 데 한 조각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책을 읽는 모든 분들께 제가 야고보서를 통해서 받은 은혜가 그대로 전이되기를 소망하며 아울러 이 책이 나오도록 수고해주신 방주석 장로님과 베드로서원 가족들에게 고마움의 뜻을 전합니다. 주후 2023년 7월

Let's Go 호세아

성경은 혼인으로 시작해서 혼인으로 끝나는 책입니다. 창세기에 아담이 하와를 아내로 맞는 내용이 나오고, 요한계시록에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나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라고 한 것처럼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을 떠나 교회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 구원의 신비입니다. 그런 구원을 보여 주는 성경에 혼인 얘기가 자주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로 맞는 얘기도 나오고,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 얘기도 나옵니다. 그런데 호세아서에 나오는 혼인 얘기는 이상합니다. 하나님이 호세아한테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호세아가 그 말에 순종합니다. 고멜을 아내로 맞아 이스르엘과 로루하마, 로암미를 낳은 것입니다. 이스르엘은 호세아의 아들이 맞지만 로루하마는 모릅니다. 호세아의 자식이 아닐 수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로암미는 호세아의 자식이 아닙니다. 부부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있을까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왜 있는가 하면, 당시 이스라엘의 실상이 이와 방불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한테 고멜을 사랑하라는 것이 말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말이 될까요? 냉담하고,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고, 열정 없는 신부를 주님이 만족스러워하실까요? 성경은 이때를 위한 그때의 말씀입니다. 호세아서가 비록 2,700년 전에 기록되었다고 해서 그때로 한정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은 달라졌지만 메시지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바라기는, 호세아서를 읽으면서 호세아가 얼마나 말이 안 되는 혼인을 했는지만 알면 안 됩니다. 고멜을 사랑해야 하는 호세아의 아픔이 하나님의 아픔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처절한 사랑을 입고 있습니다. 사랑은 절대 감미로운 감정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 역시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그렇게 아플 수 있어야 합니다. 출판의 기회를 허락하신 세움북스 강인구 장로님과 세움북스 가족들, 기꺼이 추천사를 써 주신 권율 목사님, 김영한 목사님, 서상복 목사님, 서진교 목사님, 이상갑 목사님, 정민교 목사님, 조충만 목사님, 주경훈 목사님께 고마움의 뜻을 전합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다 입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주후 2026. 2. 하늘교회 목사 강학종 - 저자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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