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년 동안 예술계는 그 면모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모하였다. 1980년대 이후 자기 자신을 예술가라 칭하는 사람들의 수가 크게 늘었다. 그리고 예술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 역시 달라졌다. 한때 열여덟 살 청년이 예술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거나 짓궂은 미소, 심지어 연민의 감정으로 그를 대했다. 부모들은 그러한 계획에 반대하거나, 그 젊은 몽상가가 먼저 ‘제대로 된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조건 아래서만 허락하곤 했다.
이제 반응은 달라졌다. 예술가를 둘러싸고 있던 낭만적 안개는 걷혔다. 창의성, 혁신, 진정성, 심지어 특이성까지도 이제는 경영 이사회에서 찬양받고 정부 정책에서 칭송받는 미덕이 되었다. 진보적인 기업가들은 혁신의 동력으로서 예술가적 기업가 정신을 활용하는 법을 배웠다. 정치인들 또한 목적지를 두고 경쟁하는 세계적 흐름 속에서 예술을 ‘창의 도시’를 마케팅하는 수단으로 여긴다. 불과 20년 만에 예술 최소한 ‘예술적인 것’ 은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이동하였다. 즉 파올로 비르노가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의 말을 빌려 말했듯이, 예술은 물속에 녹아드는 발포정처럼 사회 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앤트워프에 거주하고 일하는 백인 남성 서유럽인의 입장에서 글을 쓴다. 하지만 이 몇 마디 단어는 매우 특수한 성장 배경의 흔적을 감추고 있다. 나는 벨기에 중심부의 작지만 복잡한 지역인 플랑드르에서 자랐다. 1970년에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의 여운 속에서 복지국가의 틀 안에서 성년이 되었다. 그것은 나를 사회의 낮은 계층에서 중산층의 안락함으로 이끌었다. 1970년대에는 교육의 민주화가 이루어졌고, 플랑드르를 독자적인 언어 및 문화 공동체로 인정한 해방 투쟁에서 비롯된 문화 정책이 시행되었다. 나 같은 사람에게 이 시대는 황금시대였다. 교육은 거의 무상이었고, 사회 보장은 튼튼했으며, 문화생활은 풍요롭고 다채로웠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부터 이러한 기반들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유럽 전역에서 복지국가는 침식되었고, 중산층은 자신이 얻었던 것을 되돌려주어야 했다. 예술가와 문화 노동자들은 압박을 느꼈다. 사회민주주의는 신자유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우익과 포퓰리즘 세력이 부상했다. 제도, 시장, 그리고 서로 간의 신뢰가 사라졌다.
역사와 전통이 다른 한국 독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나의 성장 배경과 경험이 나의 관점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브라질, 우크라이나, 러시아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같은 동일한 힘들이 인식되고 있음을 보았다. 이것이 우리의 공통 기반이 될 수 있다. - 한국어판 지은이 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