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 기계는 가게로 가게에 있던 기계는
옆에 새로 난 쌀가게로 타락해가고
어제는 카시미롱이 들은 새 이불이
어젯밤에는 새 책이
오늘 오후에는 새 라디오가 승격해 들어왔다
-김수영 「금성라디오」
이것이 저것을 저만치 밀치고,
오래지 않아 또다른 무엇이 와서
저 자리의 주인이 된다.
점입가경, 타락과 승격이 순식간이다.
폭포의 전율과 급류의 공포가 마을로 내려오고
꽃과 나무들조차 성실 근면의 미덕을 버렸다.
산신령이 집을 잃고
물귀신이 거처를 구걸하리라.
위태로워라, 사람의 자리.
멀리서 횔덜린이 말한다.
“근심하고 섬기는 일,
시인들에게 맡겨진 일이로다.”
만신(萬神)과 손을 잡아야겠다.
시인과 무당은 이쪽저쪽 두루 통하는
우주의 엔터테이너.
할 일이 더 늘 것 같다.
2026년 입춘 즈음
남산 시옹암(是翁庵)에서
윤제림
판소리 적벽가 <군사설움타령>을 듣는다.
조조의 병사들 신세한탄이다.
제 처지가 얼마나 기막힌지 들어보라며
좌우를 밀치고 나서는 군사 사설마다
울음이 반이다.
제가 제일 서럽다며
천지간에 누가 저만큼 딱하고 원통하겠느냐고,
제 얘기 먼저 들어달라고
나한테까지 하소연이다.
슬픔에 우열이 어디 있으랴.
무등(無等)이다.
줄 세우기도 난감하고,
줄 것도 없다.
시 쓰는 일 말고, 이삼 년만 익히면
보태주고 나눠줄 것이 많은 일을
배울 걸 그랬다.
2019년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