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길이 있고
또한 길 아닌 길이 있다
시에도 길이 있고
또한 길 아닌 시의 길이 있다
두 길에의 첫걸음 앞에서
나는 항상 뒷걸음질이다
길인 길로 가고자 하나
나를 바라봄에
나를 찾을 수 없고
길 아닌 길로 나아가려니
나를 바라봄에
나를 잃을 수밖에 없다
오늘도 나는
길인 길로 가는 노력 삼아
시 앞에서 뒷걸음질할 요량이다
그러다 보면
내 시의 원시(元始)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시의 길인 나의 길은
나에게 아득하기만 하다
기축(己丑) 수선지절(水仙之節)에
산애재(蒜艾齋)에서
그동안 나는 주로 연작시만을 고집해 왔다. 첫시집 <자갈전답> <농업시편> 장시집 <들녘에 부는 바람> <둑길행> <삼십리 둑길> 등 농촌의 삶을 엿본 시와 '바람꽃' 등 사랑을 주제로 한 시, 고향을 노래한 <천방산에 오르다가> 등, 모두 큰 제목을 위에 두고 한 편 한 편 연작으로 쓴 것들이요, 그것들에서 가려뽑아 모은 시집들이다.
이번 시집은 그게 아니다. 아예 처음부터 낱개의 제목으로 한 시편들이다. 그 동안 삶의 현장에서 감지해온 자조적(自照的)인 결과의 산물인지 모른다.
나를 둘러싼 모든 삶의 존재들은 나와 멀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나와 철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존재들이 나를 중심으로 제각각 자기네들 사이에의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거니와, 그것들을 모두 나의 삶과 함께 그들에게도 깊은 관계를 맺어주는 작업, 그 작업을 통하여 나를 그려보기로 한 것이다. 그러하거니와 내 시집에 무엇을 더 말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가 물었다. '돈도 되지 않는 시는 써서 무엇하느냐?' 그래서 난 대답했다. '돈이 된다면 모두 나서서 시를 쓸 것이니, 참 다행이다!' 시는 왜 쓰는가? 그냥 좋아서 그냥 쓰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계속 쓸 것이라는 다짐으로 시집도 계속 낼 것이다.
이 시집 <살아갈 이유에 대하여>는 제 6회 '시예술상' 수상 시집이다. 나에게도 그런 빛이 있었는가 보다. 아무튼 시를 쓰며 살아가고, 시를 말할 수 있는 교사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세 가지 복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이 복을 계속 누리며 살아가고자 하는 다짐의 시집이기도 하다. (2004년 8월 26일 알라딘에 보내주신 작가코멘트)
시는 스스로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아무 데에서도 찾지 못한다. 징검돌 사이로 막힘없는 흐름을 가지기 때문이다. 맑은 흐름을 징검돌로 하여금 건너게 함으로써 새로운 세계, 즉 이제까지 전혀 만나지도 못한, 만나지도 않은 새로운 ‘시의 언덕’을 발견해내는 일을 찾아 나서기로 한다. 시를 쓰고 있는 한 시인으로서 다른 시인들의 시를 찾아 나선다는 것은 분명 맑은 흐름 사이를 징검돌로 건너 가치 있는 삶을 엿보기 위해 마침내 ‘시의 언덕’에 이르는 일이 될 것이다.
시는 언제나 징검돌을 건너 맑음으로 흐른다. 흐르는 동안 귀밑으로 돌돌돌 소리하기도 하며, 상큼한 느낌을 휘돌려주기도 하며, 새로운 흐름의 앞길을 씻겨주기도 한다. 흐름의 가락으로 노래를 부르며, 햇살의 감미로운 반짝임으로 불러줄 ‘시의 언덕’을 향하여 징검돌 하나하나 하나씩 내딛기로 한다.
2025년 마지막 달력 한 장을 징검돌로 건너며
산애재(蒜艾齋)에서
구재기(丘在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