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랑’을 보고 싶었다.
이 소설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 이야기이자 동시에 세 사람의 사랑 이야기이다.
나는 ‘사랑’을 보고 싶었다. 죽은 사람마저도 지독히 사랑할 수 있는 듬직한 감정이 그리웠다. 그것이 애정이든 우정이든 전우애든 간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두 맛보고 싶었다. 나는 궁금했다. 죽은 연인을 언제까지 어떤 식으로, 진심을 다해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그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지독하고 듬직한 사랑이 보고 싶었던 내 열망은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던져지게 되었다.
바람이 있다면, 사랑을 노래하고 그리는 이 책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안아주기를, 그리하여 사랑이 없다 탄식하는 세상에 그래도 우리는 사랑을 믿겠노라 다시 한 번 결심하게 만들어줄 수 있기를……
문학으로라도 불의는 막고, 정의는 실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언젠가 억울한 미투를 못 본 체한 사람이 얼마 후에 자신이 그런 누명을 쓰고서 떠났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건에 연루된 가해자들은 기회를 얻어 후원을 받고 삶을 누리며 잘살고 있다. 최소한 이런 불의는 막아야 정상적인 사회라는 생각을 오래 했다. 또 그와 반대로 미투 피해자의 억울함에 연대하는 방법으로 현재 발의된 일부 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 피해자가 두 번 세 번 억울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닌 처세술이라는 슬픈 생각이 들지 않도록.
니체는 ‘삶이 권태롭거든 베수비우스 비탈에 집을 지으라’고 했다. 현재 베수비우스는 사화산이 아니라, 휴화산이다. 언젠가는 다시 분화할 것이다. 이러한 불행이 반드시 어떤 한 장소에서만 일어나라는 법은 없다. 그 화산은 우리의 가슴속에도 잠자고 있을 테니까.
폼페이에 처음 간 것은 2007년이었다. 유적지의 폐허를 돌아보고 호텔 객실에 들어섰을 때, 침대 위에 걸려 있던 소녀의 초상화가 눈길을 끌었다. 폼페이가 화산으로 묻힐 때 죽은 소녀라는 이야기에 섬뜩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소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소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