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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종교/역학

이름:공종원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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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선차 - 차를 마시며 나를 찾는다>

저자의추천 작가 행사, 책 머리말, 보도자료 등에서 저자가 직접 엄선하여 추천한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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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의 종언과 한글 철학의 탄생이라니 ‘서양 철학의 종언’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보았다. 더구나 ‘한글 철학의 탄생’이라는 말도 처음 들어보았다. 아무튼 이 책을 내가 처음 들어본 문장의 복합이라는 점에서 어떤 미증유의 선언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다. 서양 철학의 종언이라니! 근대에 들어 철학이라고 하면 서양 철학을 먼저 떠올리고, 철학을 지망하던 학생들은 모두 서양으로 유학을 간 게 대부분이다. 그런데 서양 철학의 종언이라니. 서양 철학이 어떤 점 때문에 종언되었다는 것인가. 서양 철학이 어떤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인가. 대담한 선언이다. 필자가 알기로는 비트겐슈타인이 서양 철학의 종언을 선포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한글 철학의 탄생’이라니! 그렇다면 그동안 한글로 구성된 철학이 없었다는 뜻인가. 한국 철학은 있었지만, 한자 문화권에서 한자(개념)로 된 철학이어서 그것은 진정한 한국 철학이 아니라는 의미마저 깔려 있다. 유영모(柳永模)의 ‘없이 계심’과 ‘주체 전체’ 사상과 함석헌(咸錫憲)의 ‘씨알 사상’이 있었지만, 그것은 전통 사상으로서 개인의 이름을 건 철학이 되기 어렵고, 그것의 체계에 있어서도 서양 철학의 정치(精緻)함에 이르지 못한다는 저자 나름의 평가가 전제된 것 같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기독교 사상가라는 점에서 철학의 시대정신에 미흡하다는 의견 때문일까. 박정진 박사의 철학 인류학 저술에 몇 차례 추천사를 썼던 기억이 난다. 언론계 후배인 그는 문화 인류학자이지만, 특히 철학과 예술에 남다른 식견을 가지고 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내 서울대 철학과 동기인 김형효(金炯孝) 박사(전 정신문화연구원 부원장)와 그는 오랜 친분을 쌓으면서 철학적 대화를 나눈 사이였다. 아마도 김형효는 그를 자신의 후계자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았다. 김 박사와 나는 그의 『일반성의 철학과 포노로지』(2014년), 『네오샤머니즘』(2018년)에 함께 추천사를 썼다. 『니체, 동양에서 완성되다』(2015년)에는 김 박사의 건강이 좋지 않아 혼자 추천사를 썼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우리 세 사람은 묘한 인연이다. 김 박사가 2018년 2월, 갑작스럽게 타계한 뒤 『신체적 존재론』(2020년)에는 나 혼자 추천사를 썼다. 이번에 박 박사는 『서양 철학의 종언과 한글 철학의 탄생』이라는 대작을 써서 내게 보여주었다.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그가 철학서에 분류되어도 좋을 십여 권의 철학서를 쓰는 것을 보면 우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철학사를 보면 근대 철학은 1백여 년 정도다. 그동안 서양 철학을 배우느라 유럽과 미국에 유학한 학자는 많았지만, 아직 자신의 철학으로서 자생 철학을 내놓은 학자는 별로 없는 것 같다. 동서 철학을 섭렵한 차원에서 그것도 이 땅의 역사와 전통을 통섭한 가운데 자생 철학을 운위한 학자는 필자의 은사인 박종홍(朴鍾鴻) 선생 정도가 선구가 아닌가 한다. 박정진은 1백여 권의 저술을 가진 인문학의 기린아이면서 1천여 편의 시를 읊은 대시인이지만, 자생 철학의 불모지라고 할 수 있는 한국적 풍토에서 연이어 철학적 대작들을 써대는 그를 보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를 보면 철학에도 재능이 있는 것인가 새삼 느끼게 된다. 그동안 철학 공부를 한 학자들은 많았지만, 정작 철학 하는(philosophiren) 학자는 보기 드물었다. 철학 하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철학 하는 일은 자신이 태어난 땅과 언어, 역사와 풍토를 떠나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번에 그가 내놓으려는 『서양 철학의 종언과 한글 철학의 탄생』은 특히 철학 인류학자로서 회심의 역작인 것 같다. 서양 철학자 스스로 서양 철학의 종언을 말한 적은 있었지만, 서양 이외의 지역에서 서양 철학의 종언을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없다. 더구나 그는 서양 철학의 종언을 말하는 것과 동시에 한글 철학의 탄생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철학적 경계에서 종언과 탄생, 즉 생사의 이중성을 표방하는 것이기에 내심 기대하는 바가 크다. 나에게 더욱 놀라운 것은 ‘한글 철학의 탄생’이라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순수 한글로 근대적 의미의 철학 체계를 달성한 예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저작의 원고를 보니 후기 근대 철학의 종장(宗匠)이라 할 수 있는 니체를 기점으로 그의 추종자들인 들뢰즈, 데리다 등 해체 철학자들을 비판의 대상에 올려놓았으며, 하이데거마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대담하게 서양 철학을 ‘현상학’이라고 규정하고, 동양 철학을 ‘도학’이라고 규정하는 입장을 이미 다른 책에서 내보인 바 있다. 그의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을 요약하는 힘이 대단한 것은 일찍이 알았지만, 서양의 대가들과 대결하는(einandersetzung) 자세는 일찍이 우리 철학계에서 볼 수 없었던 현상이었는데 따라서 그에게서 어떤 신기원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그는 철학 인류학적 저술만 해도 폭넓게 잡으면 거의 20여 권을 가지고 있다. 그밖에도 그가 쓴 백여 권을 넘는 저술들은 철학적 구성의 튼실함을 말하는 한편, 웬만한 비판에 대해서도 상당한 방어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만큼 그는 한국 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고 여겨진다. 인류학자인 그는 현대 철학의 인류학적 지식의 인용이나 패러다임의 도입이 유행하는 시대를 만난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서양 철학을 이른바 4T인 ‘사물(Thing)-시간(Time)-텍스트(Text)-기술(Technology)’로 요약한다. 이것에 대응하는 서양 철학자로 ‘칸트-하이데거-데리다-들뢰즈’를 들고 있다. 칸트의 ‘물 자체(Ding an sich)’를 철학적 토론의 장으로 다시 불러온 인물이 하이데거였다고 그는 말한다. 그가 내놓은 한글 철학 ‘알(알다)-나(나다)-스스로(살다)-하나(되다)’는 순우리말이라는 점에서 철학적으로는 낯설기도 하지만, 우리말이기에 동시에 낯익기도 하다. 그리고 한글의 원음(原音)이라고 할 수 있는 ‘알-얼-올-울-을-일’이라는 여섯 글자를 ‘몸-마음-시간-공간-대상(목적)-일’로 풀이하는 것은 빼어난 철학 하기에 속한다. 동시에 이것을 서양의 육하원칙(六何原則)인 ‘who-when-where-what-how-why’에 대입하는 철학적 재능은 실로 놀라움을 안겨준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매우 자주 쓰는 그 단어(명사와 동사)가 한글 철학의 골간을 이룬다니! 그리고 인간의 철학과 역사라는 것을 ‘생명과 이용의 계보학’으로 재단하는 그의 솜씨는 가히 일품이다. 아무튼 박정진 박사는 인문학적 저술이 120권에 이른 인문학의 기린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주장이나 철학이 단순하게 공표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는 어떤 반론에도 나름대로 반박할 내공을 가진 인물임이 틀림없다. 그는 전공인 인류학에서 시작하여 신화학, 역사학, 문학, 예술 철학, 사회학, 동양 철학, 서양 철학, 그리고 의학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인 학자로서 단단한 내공의 소유자다. 그를 보면 우리나라도 이제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대중 가요 등 문화 예술에서는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지만, 문화 총량과 문화 능력에 있어서는 아직 부족한 게 많다. 그 가운데서도 자생 철학의 부재는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 큰 결격 사유로 여겨지던 터다. 자생 철학이 없는 나라가 선진국이 된 예는 없기 때문이다. 이제 철학을 비롯해서 인문학 분야에서도 세계적 기린아의 출현을 기대해본다. 박정진 박사의 학문적 행운을 기대해본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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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류학자 박정진 시인이 이번에 역저 『평화는 동방으로부터』와 『평화의 여정으로 본 한국문화』 두 책을 출간했다. 매우 서술적인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인류의 평화는 동방(동양)에서 구해져야 한다.”라는 저자의 주장을 담고 있는 저술이다. 그러나 책의 제목만 보면 독자들은 이것이 저자의 평화에 대한 철학적 담론을 집성한 ‘평화철학’ 저술이란 점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래서 저자는 책제목의 머리에 다시 ‘인류를 공멸에서 구할 깨달음의 철학’이란 말을 올려놓고 다시 제목의 끝에 ‘서양철학과 문명에 대한 정신병리학적 보고’라는 단서를 덧붙여놓고 있다. 상당히 친절하고 자상한 책 소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핏 보아도 서양철학과 서양문명은 정신병리적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인류가 진정한, 그리고 영원한 평화를 얻으려면 동양의 정신과 동양의 철학적 전승에서 해답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저자가 주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의 이 같은 주장이 간단히 얻어진 결론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저자가 이런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결코 순탄하고 간단한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두 책이 각각 5백여 페이지에 이르는 대저라는 사실에서 그것을 감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책의 전개과정 자체가 우원하고 방대하다는 것을 독자가 보아서 알 수 있겠다. 이 책에서 저자는 처음에 ‘화평을 위한 철학인류학적 탐색’에서 시작해서 ‘아시아 태평양시대와 평화체계’ ‘여성시대와 인류평화’를 거쳐 ‘화쟁론에서 화평부동론으로’라는 주제설정을 통과하여 ‘평화의 여정으로서의 한국문화’를 분석한 후에 ‘파시즘과 피시즘’이란 기발한 대립논리를 전개하여 서구문명을 동일성의 철학으로 전쟁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문명으로 보고 다시 ‘원시반본과 평화’ ‘종교와 문명의 벽을 넘어선 평화’ ‘평화의 길, 구원의 길’을 거쳐 결론적으로 ‘폭력의 근원에 대한 철학인류학적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서양철학과 문명은 모든 것을 실체화해서 그것을 획득하려고 한다.’고 보고 ‘세계를 실체로 보는 것은 세계를 소유하겠다고 하는 소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드러내는 결정적 사건이다.’라고 규정한다. 그런 관점에서 저자는 서양철학을 ‘동일성의 철학’이라고 보고 ‘동일성의 철학은 결국 동일성을 보편성의 이름으로 남에게 강요하기 마련이고, 그것이 제국주의의 형태로 나타나고 결국 전쟁의 철학이 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서양의 동일성의 철학은 결국 개인이나 국가 간의 전쟁을 초래하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서양의 과학기술과 산업문명을 낳고 이는 결국 자연에 대한 폭력으로 작용하여 온실가스의 증가와 지구온난화를 야기하고 기후변화라는 심각한 자연의 보복성 환경문제를 표출하였고 서양의 패권주의는 가공할 무기의 전쟁은 물론 크고 작은 테러리즘을 양산하고 있다고 저자는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저자는 인류의 공멸 위기 앞에서 서양은 문명의 주도권을 동양에 넘겨주어야 인류공멸을 피할 수 있다고 본다. 서양철학이 자연을 대상화하고 지배하려 한다면 동양의 철학은 자연과의 공존, 하나 되는 기쁨과 행복의 삶을 추구한다고 보는 것이다. 도교의 ‘무위자연’이라든가 불교적인 ‘무아’와 ‘공’의 삶이 해답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절대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와 우주를 항해하는 우주물리학의 자연과학과 세계를 금융자본주의로 통일하고 있는 서양의 문화·문명으로는 결코 인류가 평화를 달성할 수 없음을 증명해주려고 백방으로 노력한 책”이라고 저자는 서문에서 스스로 말하고 있다. 이 같은 저자의 말에서 느끼듯이 이 저서는 인류의 평화를 구축하는 정신적 바탕으로 서양철학의 유산인 소유와 동일성의 철학을 극복하고 동양적 정신의 표현인 일반성의 철학, 본래적 인간 회복, 공생의 정신으로 돌아가야만 진정한 평화가 구현될 수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이 같은 저자의 결론은 매우 독특한 것이다. 종래 평화철학 논의의 중심에 있었던 서양의 문제와 한계를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동양철학에서 평화철학의 논거를 구축하고 있는 것은 대단한 공헌이라 하겠다. 그리고 실제 과문의 소치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동양에서 동양사상을 기반으로 한 ‘평화철학론서’를 낸 철학자가 있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 점에서 저자가 철학전공자도 아닌 문화인류학자이면서도 이 같은 방대한 저술로 평화철학 논리를 구축한 것은 하나의 경이(驚異)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추천자로서는 엄밀한 논리구성을 요구하는 ‘철학논서’에서 이 책이 더욱 완비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저자가 내세운 동양철학의 무위자연이나 공사상이나 깨달음 같은 개념은 현실에서는 개인이 성취하는 것인데 이것을 인류 전체의 것으로 과연 확장하는 것이 가능한가의 문제이다. 깨달음이나 인간 본래존재로 회귀하는 것은 개인이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평화의 경지이겠지만 현실적으로 이 세계에 생존하는 인류 전체가 그런 평화의 경지를 다 함께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잘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혹시 석가부처님이 제시한 “모든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갖추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는 근거를 바탕으로 인류 전체, 생명 전체의 평화 구축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길이 찾아진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다. 다른 하나는 저자가 동일성의 철학, 소유의 철학으로 보는 서양철학계에도 사실은 엄연히 평화철학의 논리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고 어떤 의미에서 현재 지구촌의 평화도 그런 저들의 평화철학과 평화논의의 산물로 불완전하나마 유지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는 온건한 서양사상 포용의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맥밀란사의 ‘철학백과사전(The Encyclopedia Of Philosophy)’을 통해 서구의 철학사를 간단히 돌아보아도 ‘평화, 전쟁 그리고 철학’의 문제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다양한 주장의 틀을 보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전쟁은 불가피한 것, 심지어 바람직한 것으로 보는 현실주의적 시각과, 선의나 개선된 사회적 통제로 지속적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는 이상주의 사이에 편차가 큰 주장들이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것이다. 가령 고대 그리스에서는 전쟁이 자연질서이고 심지어 필요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조차 있었다. 헤라클리투스는 ‘전쟁이 모든 것의 아버지이고 모든 것의 왕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전쟁을 통해 자유인과 노예가 결정된다는 체념조차 있었다. 하지만 서양에서도 칸트의 ‘영구평화론’ 같은 고뇌 섞인 평화모색이 있었기에 세계 1,2차 대전을 통해 국제연맹이나 국제연합과 같은 국제기구를 통한 평화 추구 노력이 가능해진 것이라고 할 것이다. 최근엔 종교기구를 통한 국제 평화 추구 노력이 경주되는 상황에 이르고 있지만, 결국 이런 인류의 평화 구현 노력은 박정진 시인의 평화철학 구축노력과 같은 정신적 기반, 근본적 기틀 형성이 충실해질 때 가능해질 것이라 생각된다. 살벌한 인간의 지구역사에서 동양, 여성, 가정과 같은 보다 원형적인 의미를 재조명하고 있는 박정진 시인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2016년 6월 25일 우당(藕堂) 공종원(孔鍾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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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류학자 박정진 시인이 이번에 역저 『평화는 동방으로부터』와 『평화의 여정으로 본 한국문화』 두 책을 출간했다. 매우 서술적인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인류의 평화는 동방(동양)에서 구해져야 한다.”라는 저자의 주장을 담고 있는 저술이다. 그러나 책의 제목만 보면 독자들은 이것이 저자의 평화에 대한 철학적 담론을 집성한 ‘평화철학’ 저술이란 점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래서 저자는 책제목의 머리에 다시 ‘인류를 공멸에서 구할 깨달음의 철학’이란 말을 올려놓고 다시 제목의 끝에 ‘서양철학과 문명에 대한 정신병리학적 보고’라는 단서를 덧붙여놓고 있다. 상당히 친절하고 자상한 책 소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핏 보아도 서양철학과 서양문명은 정신병리적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인류가 진정한, 그리고 영원한 평화를 얻으려면 동양의 정신과 동양의 철학적 전승에서 해답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저자가 주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의 이 같은 주장이 간단히 얻어진 결론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저자가 이런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결코 순탄하고 간단한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두 책이 각각 5백여 페이지에 이르는 대저라는 사실에서 그것을 감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책의 전개과정 자체가 우원하고 방대하다는 것을 독자가 보아서 알 수 있겠다. 이 책에서 저자는 처음에 ‘화평을 위한 철학인류학적 탐색’에서 시작해서 ‘아시아 태평양시대와 평화체계’ ‘여성시대와 인류평화’를 거쳐 ‘화쟁론에서 화평부동론으로’라는 주제설정을 통과하여 ‘평화의 여정으로서의 한국문화’를 분석한 후에 ‘파시즘과 피시즘’이란 기발한 대립논리를 전개하여 서구문명을 동일성의 철학으로 전쟁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문명으로 보고 다시 ‘원시반본과 평화’ ‘종교와 문명의 벽을 넘어선 평화’ ‘평화의 길, 구원의 길’을 거쳐 결론적으로 ‘폭력의 근원에 대한 철학인류학적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서양철학과 문명은 모든 것을 실체화해서 그것을 획득하려고 한다.’고 보고 ‘세계를 실체로 보는 것은 세계를 소유하겠다고 하는 소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드러내는 결정적 사건이다.’라고 규정한다. 그런 관점에서 저자는 서양철학을 ‘동일성의 철학’이라고 보고 ‘동일성의 철학은 결국 동일성을 보편성의 이름으로 남에게 강요하기 마련이고, 그것이 제국주의의 형태로 나타나고 결국 전쟁의 철학이 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서양의 동일성의 철학은 결국 개인이나 국가 간의 전쟁을 초래하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서양의 과학기술과 산업문명을 낳고 이는 결국 자연에 대한 폭력으로 작용하여 온실가스의 증가와 지구온난화를 야기하고 기후변화라는 심각한 자연의 보복성 환경문제를 표출하였고 서양의 패권주의는 가공할 무기의 전쟁은 물론 크고 작은 테러리즘을 양산하고 있다고 저자는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저자는 인류의 공멸 위기 앞에서 서양은 문명의 주도권을 동양에 넘겨주어야 인류공멸을 피할 수 있다고 본다. 서양철학이 자연을 대상화하고 지배하려 한다면 동양의 철학은 자연과의 공존, 하나 되는 기쁨과 행복의 삶을 추구한다고 보는 것이다. 도교의 ‘무위자연’이라든가 불교적인 ‘무아’와 ‘공’의 삶이 해답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절대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와 우주를 항해하는 우주물리학의 자연과학과 세계를 금융자본주의로 통일하고 있는 서양의 문화·문명으로는 결코 인류가 평화를 달성할 수 없음을 증명해주려고 백방으로 노력한 책”이라고 저자는 서문에서 스스로 말하고 있다. 이 같은 저자의 말에서 느끼듯이 이 저서는 인류의 평화를 구축하는 정신적 바탕으로 서양철학의 유산인 소유와 동일성의 철학을 극복하고 동양적 정신의 표현인 일반성의 철학, 본래적 인간 회복, 공생의 정신으로 돌아가야만 진정한 평화가 구현될 수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이 같은 저자의 결론은 매우 독특한 것이다. 종래 평화철학 논의의 중심에 있었던 서양의 문제와 한계를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동양철학에서 평화철학의 논거를 구축하고 있는 것은 대단한 공헌이라 하겠다. 그리고 실제 과문의 소치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동양에서 동양사상을 기반으로 한 ‘평화철학론서’를 낸 철학자가 있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 점에서 저자가 철학전공자도 아닌 문화인류학자이면서도 이 같은 방대한 저술로 평화철학 논리를 구축한 것은 하나의 경이(驚異)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추천자로서는 엄밀한 논리구성을 요구하는 ‘철학논서’에서 이 책이 더욱 완비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저자가 내세운 동양철학의 무위자연이나 공사상이나 깨달음 같은 개념은 현실에서는 개인이 성취하는 것인데 이것을 인류 전체의 것으로 과연 확장하는 것이 가능한가의 문제이다. 깨달음이나 인간 본래존재로 회귀하는 것은 개인이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평화의 경지이겠지만 현실적으로 이 세계에 생존하는 인류 전체가 그런 평화의 경지를 다 함께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잘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혹시 석가부처님이 제시한 “모든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갖추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는 근거를 바탕으로 인류 전체, 생명 전체의 평화 구축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길이 찾아진다면 더없이 좋을 것 같다. 다른 하나는 저자가 동일성의 철학, 소유의 철학으로 보는 서양철학계에도 사실은 엄연히 평화철학의 논리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고 어떤 의미에서 현재 지구촌의 평화도 그런 저들의 평화철학과 평화논의의 산물로 불완전하나마 유지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는 온건한 서양사상 포용의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맥밀란사의 ‘철학백과사전(The Encyclopedia Of Philosophy)’을 통해 서구의 철학사를 간단히 돌아보아도 ‘평화, 전쟁 그리고 철학’의 문제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다양한 주장의 틀을 보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전쟁은 불가피한 것, 심지어 바람직한 것으로 보는 현실주의적 시각과, 선의나 개선된 사회적 통제로 지속적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는 이상주의 사이에 편차가 큰 주장들이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것이다. 가령 고대 그리스에서는 전쟁이 자연질서이고 심지어 필요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조차 있었다. 헤라클리투스는 ‘전쟁이 모든 것의 아버지이고 모든 것의 왕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전쟁을 통해 자유인과 노예가 결정된다는 체념조차 있었다. 하지만 서양에서도 칸트의 ‘영구평화론’ 같은 고뇌 섞인 평화모색이 있었기에 세계 1,2차 대전을 통해 국제연맹이나 국제연합과 같은 국제기구를 통한 평화 추구 노력이 가능해진 것이라고 할 것이다. 최근엔 종교기구를 통한 국제 평화 추구 노력이 경주되는 상황에 이르고 있지만, 결국 이런 인류의 평화 구현 노력은 박정진 시인의 평화철학 구축노력과 같은 정신적 기반, 근본적 기틀 형성이 충실해질 때 가능해질 것이라 생각된다. 살벌한 인간의 지구역사에서 동양, 여성, 가정과 같은 보다 원형적인 의미를 재조명하고 있는 박정진 시인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2016년 6월 25일 우당(藕堂) 공종원(孔鍾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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