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사랑했던 한 친구는 나를 떠나면서 ‘사람은 만나서 딱 인사를 하고 안부를 나누는 정도가 적당한 것 같아요’라고 말했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만큼 슬프고 간절한 일은 없을 테니깐. 살아가는 일은, 때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가는 일인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세상에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있고 또 서로가 제각각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또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항상 그것이 기적처럼 생각되곤 했었다.
어쩌면 인연이란, 우리가 같은 인간이란 몸을 입고 그러나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다는 이 놀라운 불일치를 넘어 가까워지고 싶었던 인간들의 가련한 몽상 같은 것이 아닐까? 저마다 가없이 사라지고 말 만남들에 아름다운 악보를 그리고자 했던, 가련하나 도무지 멈출 수 없었던 꿈을 향한 이토록 소박한 의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친구가 내 곁을 떠나기 전 말했던 몇몇 단어들을 기억하고 있다.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말들이었다. ‘밤, 담배 연기, 목이 긴 맥주, 편도선, 손톱, 형에게 남겨 주고 싶었어요, 창으로 흘러드는 하수구 냄새, 컴컴한 이비인후과, 밤하늘, 빨간 우체통, 그리고 편지와 수많은 눈송이들.’
슬픔은, 슬픔이란 명사가 아닌 까닭에 우리는 모든 언어를 통해 슬프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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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音)은 물질에서 나오나, 그 어떤 경우에도 물질로 남지 않는다. 음은 부피와 질량이 없고 다만 공간에 어떤 면적을 차지한 채 그냥 그 자리에 계속 존재해 있다. 가령 당신의 방이 3층에 있고 당신이 방의 공기를 한 꺼풀 뜯어 귀에 대본다면, 당신은 천년 전부터 거기에 있어 왔던 어떤 음 한 조각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모든 공간은 폐사지와도 같다. 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곳에 있던 물질은 사라졌지만 그 물질이 차지하고 있던 면적은 그대로 남아있다. 어쩌면 우리는 무너진 고대의 탑이 면적을 차지하고 있던 공간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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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오래된 믿음이 있다. 유치하고 어처구니없는 믿음이다. 난 늘 사랑하는 이들에게 선물을 하고 싶어서 글을 쓰곤 했는데, 소설이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 되리란 믿음 때문이었다.
이제 그 믿음이 희박해져 가고 있다. 희박해지는 만큼 그건 더 아름다운 꿈처럼 생각된다.
이 단편집을 누구에게 선물할까 오래 고민했다. 과연 이 하찮은 선물을 누구에게 줘야 미소를 지으며 받아줄까? 오래전 유치한 글들을 써서 얇은 문집을 만든 적이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비용을 대주셨는데, 어머니는 문집이 나오고 한해가 채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셨다. 하관식을 하던 날 난 그 싸구려 문집을 어머니의 곁에 묻어주었다. 그러면서 자못 비극적으로 울었는데, 난 눈치가 없는 사람으로 항상 분위기 파악을 못 해 따돌림을 당해 오곤 했으므로, 어머니를 잃은 자식으로서 더 엉엉 울기 위해 애를 써야만 했다. 그러나 내 비극적 몸짓은 내 슬픔을 대신하지 못했다. 나의 슬픔은 나의 비극적인 몸짓에 입이 가린 채 울지도 못했다. 그 시절 슬퍼하기 위해 애쓰느라 돌보지 못했던 나의 슬픔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 첫 번째 작품집을 어머니에게 바친다.
그녀가 존재했던 부평 어딘가에 있을, 여전히 텅 비어있는 그녀의 면적(面積)에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