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신학교 졸업, 충남 논산시 양촌면 신정교회 개척, 1971년 한국대학생 선교회(CCC) 간사 엮임
청주지구, 속초, 춘천, 서울 중앙본부, 서울 동지구, 인천지구 대표간사 엮임, 1985년 미국 이민,
뉴욕 동산 장로교회 전도사 취임, LA 서부 기독교회 목사안수, LA 갈보리 중앙교회 개척,
American Theological Seminary 성서고고학 연구, PCMG(Pacific Coast Mission Group) 선교회 설립,
PCMG KOREA 후원이사, 성지 사진 동호회 회장, 2013 베들레헴 예수탄생 세계음악축제 기획
몇 해 전에, 사도 바울의 발길을 찾아 순례하던 이고니온Konya 어느 골목에 종탑이 솟아 있는 건물이 있어 들어가 보니 동방 정교회였다. 잠시 후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자가 어두컴컴한 교회당에 들어와 “당신들은 누구냐?” 하고 물어, 우리들은 목사인데 교회가 있어 허락도 없이 들어왔다고 하며 죄송함을 표했다. 그런데 갑자기 “배신자” 하며 나가라고 박대를 한다. 나는 돌아서면서 내가 참으로 배신자인가 생각했다. 한참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래 ‘나는 참으로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배신자’가 맞다.
그 후 그가 말한 배신자들의 숨결과 발자취를 찾아 순례하기 위해 몇 해 동안 가슴에 품고 기도해 왔다. 그러던 2015년 독일 통일 25주년을 축하하는 포럼과 세미나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때 독일에서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1517, 10, 31)을 기념하기 위해 지방마다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보았다. 포럼을 마치고 체코의 프라하에서 얀 후스의 개혁과 순교의 현장을 순례하면서 받았던 깊은 감동으로 인해 나는 다시 개혁자들의 도전과 열정의 현장을 순례할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순교자들의 흔적을 안내 할 동행자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던 중에 기적적으로 내가 출판했던 을 읽은 독일의 이창배 선교사와 연결이 되었다. 그와 함께 1년 가까이 자료를 참고해 가며 본격적인 배신자들의 흔적을 찾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 무엇보다 이선교사의 순례 계획에 성령의 도우심이 있었음은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개혁자들의 도전과 열정을 찾는 순례의 길! 그 길에서 만난, 복음의 소식을 누구나 자국어로 직접 읽을 수 있도록 하고자 했던 위클리프, 틴데일, 얀 후스, 사보나롤라 그리고 토마스 크램머 등은 화형으로 순교 당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흔적은 오직 기념비 뿐이었다. 그러나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복음적 신앙을 지켜 왔던 왈도, 마르틴 루터, 잔 낙스, 진젠돌프, 잔 번연, 잔 칼빈 그리고 요한 웨슬리가 남긴 흔적은 전 유럽과 바다 건너 영국, 스코틀랜드까지 산재해 있다.
AD 312년 콘스탄티누스가 로마 제국의 새로운 황제가 되자 AD 313년, 모든 로마인들에게 기독교를 로마인의 한 종교로 공인한다는 밀라노Milano 칙령을 선포하였다. 그로 인해 기독교가 로마인의 한 종교로 인정받게 되자 어둠 속에 묻혀 살던 성도들이 드 저자의 글디어 밝은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으며 그토록 갈망했던 신앙의 자유 또한 얻게 되었다. 더불어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사업상의 각종 특혜와 보호를 보장받게 됐다. 이 때문에 이방 신을 섬겼던 사람들도 기독교로 개종하는 일이 많았다. 그 때문에 교회는 부흥됐다고 하나 인간적이며 복음 없는 교회로 변질하여 갔다. 그 중에서도 몇몇 신실한 성도들은 정치적, 경제적 특혜보다 오직 복음만을 지키려 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Heinrich 4세(1077. 1. 28)는 교황 그레고리 7세의 파문장破文章을 받고 카노사Canossa에 머물던 교황에게 찾아가 파문 철회를 요청하기 위하여 무릎을 꿇었다. 그토록 철저히 외면당하던 황제는 교황 그레고리의 선처로 어렵사리 복위되었으나 황제를 굴복시켰던 교황은 정치와 교회에 있어 이전보다 더욱 절대자絶對者의 존재存在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교황의 치세와 교리는 무소불위의 진리가 되었고 그가 바라는 모든 것은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 되었다. 그러므로 누구도 교황을 비판하거나 비방할 수 없게 되었으며 생명의 말씀(라틴어 성경)인 성경 마저도 읽을 수 없도록 금지되었다.
그러나 백성 중에는 로마교회의 제도나 교황의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보다 오히려 불만이나 적대감을 품었다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자 로마교회는 이들을 색출 제거하기 위하여 정보나 밀고密告를 얻어 종교재판을 받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복하는 자들은 마녀사냥이나 배신자란 낙인을 찍어 협박과 공갈을 더 했다. 또한 복음만을 지키고 전하려 하는 자들을 이단자로 몰아 모든 재산과 제물을 몰수하고 이름 없이, 흔적도 없이 화형으로 처형하거나 타지他地로 추방해 버렸다.
그와 더불어 로마교회는 복음을 빙자한 다문화 다민족 종교로 더욱 변질하여 타락해 갔다. 그토록 어둡고 암울한 시기에 오직 복음을 위해 목숨까지 버려야 했던 순교자들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마침내 날이 새고 해가 갈수록 로마교회에 대한 개혁자들의 도전과 열정은 유럽 각처에서 들풀처럼 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