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나의 무서움은 언제나 금붕어로부터 시작됐다.
어릴 적, 직사각형 어항에 있었던 주황색 금붕어로부터.
그때 나의 금붕어는 어항에서 살고 있었을까, 갇혀 있었을까. 모른다.
나는 그 답을 몰라 (괄호)를 쳐두었다.
그 괄호는 나에 대한 질문이자 망설임이었다.
여전히 나는 모른다.
그렇게 어느 것 하나도 확신하지 못한 채로 어른이 되었다.
확신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닌,
확신하지 못한 채로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
모든 문장마다 괄호를 넣고 싶은 심정으로.
도망치기 위해서.
어떻게든 완성하고 싶지 않아서.
완성된 말은 지워지지 않으므로 나는 무섭다.
여전히 나는 글을 쓰는 것이 무섭다.
부끄러워서 미안했다. 미안해서 부끄러웠다.
내가 만들어낸 어떤 문장이 누군가에게 오래될 괄호가 되지는 않을까,
그 괄호 안에 멈춰있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이었다.
서태지의 ‘울트라맨이야’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우주를 만난 기분이었을까.
괜찮지 않다고 말해. 그래. 괜찮지 않잖아. 어때? 괜찮지 않은 것도 괜찮지?
그렇게 말을 거는 듯했다.
그것이 이 소설의 시작이었다.
이 소설을 쓰고 나서 우주라는 이름에 괄호를 주고 싶었다.
이제는 둥글게 감싸 안아줄 수 있는 커다란 괄호를.
우주였고 우주가 아닌, 어쩌면 내가 될 수도 있는 우주에게.
어떤 날에는 우주가 나보다 더 어른이었고 어떤 날에는 우리는 같은 아이였다.
우주는 무심할 줄 알았고 외로울 줄 알았다.
우주는 내가 미처 다 완성하지 못한 문장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우주를 이해하려고도, 이해받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 언어를 믿을 것이다.
이제부터 괄호는 닫기 위해서가 아닌 어떤 것도 닫히지 않기 위한 것임을.
말해지지 않는 것을 말하기 위한 언어.
끊임없이 너와 나, 우리 사이를 반복해서 말해지는 언어를.
우주를 세상으로 나오게 해 준 심사위원분들과 넥서스 편집부 분들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여전히 부끄러워하라고, 앞으로 평생토록 부끄러워하라고 대신해서 말해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여전히 말하지 못하는 수많은 괄호들에게 부끄러워하라고.
이 느낌을 잊지 않으려 나는 천천히, 그리고 반복적으로 글을 쓸 것이다.
2025년 여름
신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