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입지(立之), 호는 동고(東皐)·간이당(簡易堂)이다. 아버지는 최자양(崔自陽), 어머니는 무송 윤씨(茂松尹氏)며, 예안 이씨(禮安李氏)와 결혼해 아들 동망(東望)과 딸 하나를 두었고, 서자로 동문(東聞)과 동관(東觀)이 있다.
1561년(명종 16년) 23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장연(長淵)·옹진(甕津) 현감과 재령(載寧) 군수를 지냈다. 1577년(선조 10년)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질정관으로 첫 번째 사행에 나섰으며, 귀국 후 재령 군수로 재차 부임했는데, 이때 해주(海州)에 은거 중이던 이이와 교유했다. 성천 부사(成川府使), 장례원 판결사(掌隸院判決事), 진주 목사(晉州牧使)를 거쳐,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원병을 청하는 문서를 짓는데 능문자(能文者)가 필요하다는 윤두수(尹斗壽)의 추천으로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에 발탁되었으며, 같은 해 주청사(奏請使)로 임명되었지만 직책에 걸맞지 않다 해서 부사(副使)의 신분으로 사행길에 올랐다. 이때 지은 글들이 중국 관료들로부터 크게 칭찬받았지만 가문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끝내 요직에 등용되지 못했다. 1596년부터 1602년까지 간간이 안변 부사(安邊府使), 공주 목사(公州牧使), 여주 목사(驪州牧使) 등의 외직을 얻어 나가기도 했으나 주로 승문원 제조로서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전담했다.
개성에 우거했을 때는, 그의 문(文)과 차천로(車天輅)의 시(詩), 한호(韓濩)의 서(書)를 일컬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62세 때는 평양으로 옮겨 간이당(簡易堂)을 짓고 머물렀다.
문집으로 ≪간이집≫ 9권 9책이 있으며, ≪주역본의구결부설(周易本義口訣附說)≫과 ≪한사열전초(漢史列傳抄)≫, ≪십가근체(十家近體)≫ 등을 편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