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서울 공예박물관을 거닐다가 문득 유목민으로 살아가는 어느 뿔 공예가의 얼굴을 어렴풋이 그려보았다. 그보다 훨씬 오래전, 테이트 브리튼에서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를 보았을 때 마음속에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이 소녀가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을 방법은 없었을까.
서로 다른 장소에서 먼 시차를 두고 태어난 그 두 가지 생각이, 어느 날 한자리에 모여 나란히 걷기 시작한 이야기가 『각의 도시』다. 뒤를 돌아보니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멀고 낯선 장소까지 와버리고 말았지만, 도착한 곳에 어느덧 정이 퍽 들어버린 모양이다. 요 몇 년 매일 함께 뒹굴던 인물들을 배웅하는 지금, 아쉬운 마음이 좀처럼 꺼지지 않으니 말이다.
알아차린 분도 계시겠으나 여러 이름을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빚졌다. 도시의 이름인 ‘라뎀’은 ‘Lathem’을 소리 내 읽은 것으로 ‘Hamlet’의 철자 순서를 바꾼 애너그램이다. ‘포르틴’은 노르웨이 왕자의 이름, 서점 ‘엘시노어’는 성城의 이름에서, 흑각 ‘트랩’은 희곡의 3막 2장에서 극 중 햄릿이 ‘쥐덫the mousetrap’이라고 언급하는 데서 인용했다. 일부 등장인물의 이름에도 희곡 인물의 흔적을 조금씩 녹여두었으니 자유로이 발견해주시기를 바란다.
주권과 정체성을 빼앗긴 도시에서 방향을 찾고자 헤매고 고민하는 소년은 여기에도 있지만, 그 행보가 ‘부재함’보다는 ‘존재함’으로 ‘사라짐’보다는 ‘드러남’ 쪽으로 향하기를 바라며 쓴 글이다. 현재 우리의 모습을 조금씩 거울에 비춰보기도 하면서. 하지만 햄릿이라는 이름이 그저 낯설게 들린다 해도, 이 소설의 동행이 되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소중한 손길을 더해주신 분들이 많다. 긴 여정의 다정하고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주신 윤소진 편집자님과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 팀, 초고를 작업하는 동안 꼭 필요한 조언과 응원을 보내주신 이선 작가님, 긴 작업 중에도 묵묵히 시간을 양보하고 나누어준 가족들과 첫번째 독자 다니엘에게 큰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 페이지를 읽고 계신 당신께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덕분에 또 써나갈 용기를 얻는다.
2025년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