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난(Kyung-Nan Koh)은 한국외국어대학교 HK(Humanities Korea) 교수이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호주국립대학교 인류학과의 2015 Nadel Essay Prize를 수상하였고 국제학술지 Signs and Society의 편집이사이며 역서로는 『기호인류학 특강: 문화의 화용론적 기호학』이 있다.
인류학이 무엇을 하는 학문인가를 이야기할 때 흔히 인류학은 민족지적 방법론으로서 다른 유사학문과 차별된다고, 연구자가 한 사회에 장시간 동안 자신을 몰입함으로써 마련한 토박이 문화에 대한 자료와 이해를 사용하여 더 과학적 층위에서의 비교연구를 수행한다고 말하곤 한다. 우리가 아는 현대 인류학은 초기부터 비교문화연구를 연구의 궁극적인 지향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돌이켜보면, 자의에 따라서이든 외부의 시각이 그러하든, 20세기 인류학에서는 유독 앞의 첫 문장에서 자료수집의 방법론만이 분리되어 그것의 특징으로 주목받은 느낌이 없지 않다. 이것은 어쩌면 비교의 관점, 도구, 그리고 틀, 즉 문화에 관한 비교연구에의 메타언어와 프레임체계가 때로는 부족하거나 부적합했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과거와 현재의 우리의 성찰적 노력은 조금씩 더 분명한 비교문화연구의 ‘에틱’ 프레임체계, 개념, 그리고 언어의 구축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최소한 최근에 널리 “기호인류학”으로 지칭되는 인류학의 세부 연구 분야의 기본적 성향이자 성격이다. 기호학을 접목하여 특수한 민족지적 현장자료를 분석하는 기호인류학적 연구는, 적절한 기호학적 개념의 도입과 응용을 통하여 사회?문화과정들과 그것들의 교차적 양상?현상을 더욱 세밀한 차원에서, 명확하고 분석적이며 정돈된 논리로서 설명하고 또 비교하고자 한다. 기호와 사회의 ‘세미오시스’ 차원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문화적” 활동, 그 화려하고 복잡한 것의 속성, 관계성, 역동성, 혹은 유기성 등을 더욱 체계적으로 또 보편적으로 풀이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개별 의지와 노력이 지금과 같은 작은 ‘움직임’으로 응집되고 확산하기 시작한 데에는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 시카고 대학교 마이클 실버스틴(Michael Silverstein)과 원저자를 비롯한 그의 후학들의 노력이 주요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원저자 리처드 파멘티어는 현대 기호인류학의 발전과 확산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고, 원저 『문화의 화용론적 기호학』(The Pragmatic Semiotics of Cultures)은 특히 파멘티어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특강을 기호학 학술지『Semiotica』에서 한 권의 모노그래프(monograph)로 출판한 것이다. 여기서 파멘티어는 소쉬르와 퍼스의 기호 이론들을 토대로 언어인류학, 문화인류학, 고고학과 교차하는 기호학적 인류학의 이론적 배경과 역사를 요약하고 레비스트로스, 기어츠, 싱어, 바르트, 로트만, 보드리야르 등 인문학과 사회과학적 문화비교에 기호학적 이론을 접목한 주요 이론가들의 핵심적 문제점들을 지적, 보완하며 종교, 토착 문학, 역사 담론, 법 담화, 고고학적 물질문화, 음악, 회화 등의 사례를 다룬 대표적인 문화 분석들을 해체, 재분석하며 방법론적인 혜안을 제시한다. 이렇게 광범위한 이론?방법론적 내용을 집약적이고 꼼꼼히 다루다 보니 원저의 언어는, 마치 기호인류학적 접근의 치열함을 증명이나 하듯, 매우 빽빽하고 함축적이며 그럼에도 (혹은 그래서) 우아하고 일관된 하나의 긴 논문으로 읽힌다. 문장 하나하나가 절대 대충 넘김이 없이 여러 가지 것을 요약, 연결, 지시, 해석, 혹은 비판하고 있고 또 기본적인 기호학 개념들에 관한 사전 지식을 전제하고 있어 가독성의 문제가 우려되지만, 기호학적 비교문화 분석에 관한 전반적이면서도 집약적인 보기 드문 설명이니만큼 호기심 많은 독자에게 알찬 소개서 또는 해설서로 해석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번역서는 원저자와의 교신을 통해 원저에서 발견되는 작은 오류들을 몇 군데 수정하였다. 내가 퍼스 기호학을 처음 배우던 중 도움을 받았던 (그리고 여전히 도움받는) 글들의 저자이자 이 번역서의 원저자이고, 또 학술지 『Signs and Society』의 창간부터 함께한 릭(Rick)에게 인사를 전한다. 어휘구사력이 만족스럽지 못한 탓에 도움이 종종 필요했다. 조준래, 강병창 선생님들은 어휘사용에 관한 성가실 수 있는 질문을 늘 기꺼이 받아주시고 의견을 주셨다. 전기순, 임대근 선생님들께는 번역서 출판을 지원해 주심에 감사드린다. 교정은 신소혜선생님이 애써 도와주셨고 김신 선생님은 좋은 소개를 해 주셨다. 강윤희, 이윤희, 서종석 선생님들은 전문분야 용어 번역에 관한 조언을 주셨다. 다른 세미오시스 연구센터의 일원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실버스틴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나는 여기에서의 번역이 최대한 기호학적 의미관계의 변형이 아닌 전환(transduction)이 될 수 있도록 고민했다. 그러나 충분히 더 매끄럽고 적절한 전환법들이 있을 것이며, 모든 오류의 책임은 당연히 내게 있다.
2016년 4월
고경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