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 원본 그대로”전 7권 중 1권을 출간하면서
임진년에 처음 발생했다 하여 보통 ‘임진왜란’이라고 하며, ‘7년 전쟁’이라고도 한다. 1592년(선조 25년)에서 1598년(선조 31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왜군이 조선에 쳐들어온 싸움이다. 정유년에 제2차 침략을 ‘정유재란’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역사상 처참한 싸움의 하나였다.
1592년 4월 일본군 선봉대가 부산포로 쳐들어와 서울을 향한 북진을 계속해 2개월도 채 못 되어 전 국토가 유린되었다. 선조와 세자는 평양으로 피난하였다.
한산도대첩 등 해전의 승리로 일본의 해상작전이 좌절되고, 전라도 곡창지대를 지킬 수 있었으며 육지의 곳곳에서도 유학자들과 농민이 주축이 된 의병이 일어나 육상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12월 명나라는 4만 3,000여 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1593년 1월 8일 조명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고 일본과 협정에 들어갔다. 강화가 결렬되자 1597년 다시 침입했으나 육지에서는 권율·이시언의 조명 연합군에 패하고 해상에서는 이순신에게 패하여 7년에 걸친 전쟁이 끝났다.
선조 때 조선의 조정에서는 정치 싸움을 일삼으면서 국방을 소홀히 하였다. 이이가 십만 군대를 길러야 한다며 ‘십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조정에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한편,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국내의 혼란을 수습하고, 전국을 통일하였다. 도요토미는 내부의 불안을 없애기 위해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침공하고자 하였다. 이에 조선에게 통신사를 보내라고 요구하였다. 조선은 통신사를 통해 일본의 침략 계획을 알았지만 전쟁 준비를 갖추지 않고 국방을 소홀히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무리한 요구 때문에 2, 3년 만에 화의는 결렬되고 다시 일본의 14만 대군이 침공하니,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조선군은 명나라 군과 함께 총반격을 가하였고, 이순신은 남은 선박 12척으로 결사적인 항전을 벌인 끝에 바다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왜군이 후퇴함으로써 7년간의 왜란은 끝났다.
임진왜란은 조선, 명나라, 일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은 전 국토가 황폐해지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경제적으로 파탄을 맞게 되고, 사회 질서가 무너졌으며, 인명의 손상은 물론 많은 문화재를 잃고 말았다. 명나라는 대군을 조선에 파병하여 국력이 소모된데다가 재정의 어려움마저 맞았다. 결국 명나라는 만주의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에게 세력을 넘겨주고 말았다. 일본은 조선의 도자기 기술자를 포로로 데려가 도자기업을 발전시키고, 조선의 활자를 탈취하여 활자 기술의 큰 발전을 이루었다.
사람이 태어나서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생도 하나의 역사다. 한 국가가 건국되고 존속하는 것도 역사의 연속이다. 사람이나 국가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참된 역사의 인식과 도리가 아니다. 역사는 과거, 현재를 통해 미래를 열고 있다. 역사의 과거와 현재를 부정하면서 밝은 미래를 바라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조선 시대의 7년 전쟁을 좀 더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엮으면서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의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는 말을 생생하게 체험을 했다.
본서 <7년 전쟁, 임진왜란과 정유재란>(1권)은 지금까지 출간된 어느 서적보다 읽기 쉽도록 편집하였다. 전 7권으로 출간된다. 국가나 사회의 올바른 역사를 정립과 독자들의 과거, 현재를 넘어 밝은 미래를 열어가는 초석이 되길 소망한다.
2021년 마지막 12월에
엮은이 김흥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