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Yale University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KIEP) 연구위원을 거쳐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건국대학교 대학원장과 교학부총장을 역임하였고,
한국경제발전학회, 한국국제금융학회와 한국국제경제학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현재 건국대학교 명예교수이다. 저서로는 『국제통상론』, 『국제금융경제』, 『한국경제의 이해』, 『부채의 역습』 등 다수(공저)가 있다.
프롤로그
한국경제는 어디로 가는가?
현제명 작사·작곡의 ‘희망의 나라’라는 오래된 가곡이 있다. 경쾌하고 밝은 곡조를 흥얼거리며 가사를 음미하노라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1931년 일제 강점기 때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선조들은 무엇보다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였을 것이다. 또 새 나라에서 자유와 평등을 누리고, 평화와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1945년 해방 직후의 혼란과 1950년 6·25 동란을 거치며 1960년대 초까지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지금은 어떠한가? 1인당 국민소득이 선진국 문턱을 넘어섰고,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탈바꿈하였다. 많은 개도국이 한국의 발전 경험을 배우기를 바라고, 전 세계 젊은이들이 K-pop에 열광한다. 정말 우리는 ‘희망의 나라’에 도달한 것인가?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희망의 나라는 국민들에게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삶의 질을 보장해야 하고, 그러려면 높은 소득과 잘 다듬어진 제도가 필요하다.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선진국 수준에 다가섰지만, 모두가 여유로운 것은 아니다. 기대수준이 높아진 만큼 불만도 커지며, 외부의 시선과 내부의 자기인식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주변에는 우리가 정말 선진국인가라고 자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국가에도 생명주기가 있다면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이어지는 인생사와 비슷할 것이다. 현재의 선진국들은 유년기와 청년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빠르게 성장하면서 구성원들의 만족도가 높아졌다. 그러나 장년기에 접어든 어느 순간인가 사회와 경제의 활력과 제도의 유연성이 눈에 띄게 떨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 얼마나 건강한지는 선천적인 체질뿐 아니라 생활 습관과 절제에 달려 있듯이, 국가 역시 대외 환경과 내부 제도의 상호 작용에 의해 노쇠해지기도 하고 강건해지기도 한다.
폴 케네디(Paul Kennedy)는 『강대국의 흥망』이라는 책에서 강대국 쇠퇴의 핵심 원인으로 ‘제국적 과잉팽창’을 지적하였다. 경제력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과도한 군사적 팽창이 쇠퇴를 초래한다는 그의 분석은 로마제국과 대영제국의 역사에 정확히 들어맞을 뿐 아니라, 오늘날 미국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한편, 찰스 킨들버거(Charles P. Kindleberger)는 『경제 강대국 흥망사 1500–1990』에서 1500년 이후 베네치아,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독일, 미국, 일본 등 경제강대국의 부상을 추적하면서, 이들 나라가 공통적으로 “성장기–성숙기–쇠퇴기”라는 생명주기를 겪었다고 썼다. 그는 강대국의 쇠퇴를 낳는 요인으로 전쟁과 대외충격 같은 외부 요인뿐 아니라, 투자와 혁신의 위축, 제도의 경직성과 이해관계의 포획, 사회 내부의 갈등 심화 같은 내부 구조의 노화를 강조한다. 이 책에서 주목하는 ‘선진국병’은 바로 킨들버거가 포착한 이러한 성숙기의 병리, 즉 소득수준은 높지만, 제도와 사회의 생명력이 떨어지며 활력을 잃어가는 상태를 의미한다.
한국은 흔히 ‘중진국 함정’을 넘어서서 선진국 지위를 획득한 거의 유일한 나라로 소개된다. 하지만,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그 평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현실이 만만치 않다. 성장률은 1%대로 떨어졌고, 생산가능인구는 이미 감소 국면에 들어섰다. 청년층의 취업난과 저출산은 구조적 고착 단계에 접어들었으며, 치솟는 부동산가격과 사교육비 부담은 미래 전망을 어둡게 한다. 경제의 혁신역량마저 둔화하면서, 한국은 선진국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할 것인지, 아니면 장기침체 끝에 다시 중진국으로 미끄러질 것인지의 갈림길에 서 있다.
한국 사회는 마치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한 불안한 균형 상태에 놓여 있는 것 같다. 다행스럽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런 위기와 정체의 시간은 한국만의 특수한 경험이 아니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성장 둔화와 사회적 분열이라는 ‘성숙기의 딜레마’를 이미 한차례 이상 겪었다. 예를 들면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그리고 미국은 베트남전 이후 1970년대에 큰 위기를 겪었다. 독일, 일본 및 이탈리아는 패전의 폐허 속에서 기적적 부흥을 이뤘지만, 일본은 개혁의 골든타임을 놓친 채 ‘잃어버린 30년’을 피할 수 없었고, 이탈리아는 성장의 정체가 새로운 일상이 된 지 오래이다. 선진국 중에서도 모범국이라고 평가받던 독일마저 최근 역성장을 경험하면서 ‘선진국병’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이 책은 한국이 당면한 위기를 ‘선진국병’이라는 시각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선진국병은 단순히 성장이 둔화하는 현상을 넘어서, 혁신, 제도 및 정치가 동시에 경직되며 사회 전체의 활력이 떨어지는 상태를 가리킨다. 중진국 함정이 “선진국 문턱을 넘지 못하는 덫”이라면, 선진국병은 “문턱은 넘었지만 성장과 복원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이미 이러한 선진국병의 전형적 증상을 폭넓게 공유하면서 한국 특유의 구조적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병”에 걸렸다고 할 수 있다. 각종 지표상으로는 선진국에 올라섰지만, 일상에서 체감하는 삶의 질과 미래에 대한 신뢰는 오히려 후퇴하는 듯하다. 성장률은 바닥을 기고, 청년들은 ‘괜찮은 일자리’를 찾지 못한 채 불안 속에 내몰린다. 혁신과 도전 대신 눈앞의 이해관계와 안전한 선택이 우선시되고, 정치와 행정은 끝없는 갈등과 더딘 조정으로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은 선진국이라면 응당 누려야 할 삶의 질과 안정, 개방성과 포용성 대신 집단적 피로와 냉소가 점점 더 깊게 자리잡아 가고 있다.
선진국병에 걸려가는 한국경제의 역동성을 다시 되살릴 수 있을까? 답은 냉정한 현실 인식과 실행으로 이어지는 개혁의지에 달려 있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生卽死, 死卽生)”라는 말은 전쟁터에서만 통하는 말이 아니다. 체제를 바꾸고, 기득권을 건드리고, 익숙한 방식을 내려놓는 일은 언제나 두렵다. 그러나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제1부에서는 선진국의 조건과 선진국이 걸리기 쉬운 선진국병의 실체를 분석한다. 제2부에서는 영국, 일본, 독일 및 이탈리아 등 실제로 선진국병을 경험한 사례를 통하여 선진국병의 다양한 모습과 개혁의 성과와 한계를 살펴본다. 제3부에서는 한국경제의 증상과 근본 원인을 진단하고, 선진국병을 극복하기 위한 정책 과제를 모색한다.
이 책이 멈춰 선 한국경제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작은 동력이 되어, 우리가 모두 다시 한번 ‘희망의 나라’를 꿈꿀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