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연세대학교에 출강했으며 현재 ‘번역문학연구소’ 전임 연구원이다. 저서로 『프랑스 문학에서 만난 여성들』(공저, 2010), 『프랑스 작가, 그리고 그들의 편지』(공저, 2014), 사진집 『마들렌』(2013)이 있다. ‘철학아카데미’ 운영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미술 강의와 번역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자라나는 딸의 모습을 찍기 위해 카메라라는 낯선 도구를 손에 잡은 지 25년,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다. 시간이 날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들판과 거리를 돌아다녔다. 유아원에서 돌아온 딸 앞에 그날 찍은 사진들을 펼쳐놓고 좋은 사진을 골라보라고 내 놓았다. 아이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단숨에 몇 장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내가 좋다고 내미는 사진에 고개를 가로젓기도 한다. 나의 사진 확인 작업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눈이 시리도록 렌즈를 들여다보았고, 다리가 붓는 줄도 모르고 온 종일 암실에 처박혀 있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카메라와의 만남은 내 욕망에 의한 무의식적 선택이 아니었을까. 바람과 같이 일어났다가 흩어져 버리는 매 순간의 생각들. 내게는 늘 그것이 문제였다. 나는 생각들과 이미지들을 붙잡아 두고 싶었다. 머릿속에 굴러다니는 문장들은 언어로 해결할 수 있지만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언어의 한계 바깥에 있다. 내 시선이 안겨드는 풍경들, 사물들을 감싸 안으려는 내 시선의 욕망은 긴 세월 동안 카메라와 결탁해 왔다.
풍경에 굶주리고 사로잡힌 시선은 무거운 눈꺼풀이 더 이상 견디기 힘들 때까지 바깥으로, 풍경 속으로, 사람들 사이로 나돌아 다녔다. 카메라는 내 시선의 대행자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도구가 되었고. 나는 그 도구의 동반자일 뿐이었다.
세계의 균열은 내 안의 균열이다. 내 안의 균열은 세계의 균열이다. 카메라는 세계의 균열을 드러내고 내 안의 균열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어두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산동네. 가난한 사람들은 모두 일터로 나가고 없었다. 영하 17도의 칼바람이 불고 있었고, 어린 고양이 한 마리, 투명한 겨울의 빛이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원색 페인트칠을 한 낡고 빛바랜 담벼락에는 고단한 삶 속에서도 마음 깊숙이 간직하고 있는 그들의 삶에의 희망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텅 비어 버린, 낯선 동네의 침입자인 나는 몇 시간동안 골목 구석구석을 조심스럽게 돌아다녔다. 바람을 막기 위해 세워둔 부서진 판때기들과 찢어진 비닐조각들 위로 오후 두시의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만한 옹색한 골목, 계단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허술한 층계를 오르내리며, 나는 삶의 냄새를 맡고 다니는 한 마리 개였다. 마치 그곳에서 잃어버린 내 어린 시절의 삶의 진실을, 자본주의의 현란한 불빛 속에서 놓쳐버린 진실의 씨앗을 찾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마들렌 과자가 프루스트에게 콩브레의 풍경을 되살아나게 했듯이 말이다.
경사진 비탈길에서 빛을 붙들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셔터를 눌러대었을까. 현기증을 느끼며 일어서니 찬바람이 휑하니 지나간다. 빛은 어디에나 비치고 있었다. 가난한 이 골목에서 햇살은 더 없이 강하고 순수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고요와 빛이 내 안에서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던 사물과 침묵의 빛이었다.
사진을 찍는 행위는 눈앞의 세계와 사물과의 마주함이다. 그가/ 그것이 내 앞에 있고, 내가 그/그것 앞에 있음을 확증한다. 그는/그것은 그 순간 나의 현존을 확증한다. 렌즈를 들여다보고 셔터를 누르는 행위는 내 손가락의 떨림을, 내 입술의 숨결을, 내 살의 떨림을 가장 선명히 느끼는 대상과의 공존이고 공명이다. 문득 어떤 대상에 이끌려 셔터를 누르는 순간 떨림의 사건이 일어난다. 우연한 마주침에 의한 존재의 전율, 현존의 확인, 그게 내 사진 행위의 전부다. 한 장의 사진이 갖는 의미는 사후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 사진행위는 렌즈를 통해 냄새 맡고 만지고 듣는 존재론적 의미를 지닌다. 고정된 이미지 그 어딘가에서 냄새가 나고, 어른거리는 빛과 리듬이 느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