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할아버지의 시조창을 듣고 자랐다. 새벽이면 빠지지 않는 할아버지의 맑고 청아한 시조창이 가슴을 흔들었다. 그래서 나는 문학이라는 이름을 갖고 산다. 그냥 문학에 관한 관심이 아니라 어떤 텍스트로 하여금 예술적 작품이 되게 하는 시적 탐구를 하는 것이다. 삶이 힘들거나 지칠 때 시는 내 아시람이다. 그 과정이 괴로운 것이든 즐거운 것이든 한편의 시를 써놓고 느끼는 감성과 성취 의욕은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다. 직유와 은유 사이에는 비교격조사의 유무에만 그치지 않는 중요한 차이가 가로놓여 있다. 은유는 보다 시적인 비유로서 나아가서는 그 뿌리가 시의 본질로 직결되는 비유인 것이다. 그래서 시를 쓰는 데는 가슴을 짜는 듯이 한 노력과 아픔이 필요했다.
언어는 의미의 기호이어서 새로운 의미의 창출은 곧 새로운 언어의 창조를 뜻하게 된다. 새로운 언어의 창조는 세계를 언제나 새롭게 낯설게 바라보고 그렇게 하여 그 새로운 인식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나의 고해의 필수적 과제이다. 영원성에 대한 체험, 낯설기의 상상적 체험에 대한 동경 때문이다.
상상력의 근원은 보다 높은 동기에 있기에 한 사람을 사랑하고 시를 쓴다. 내가 바라는 그 어떤 영원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곳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 없이는 살 수가 없어 시를 쓴다. 그것은 내 삶의 에너지요 양식이기 때문이다.
2016. 어느 가을
약천藥泉 정관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