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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국내저자 > 인문/사회과학

이름:박지원

출생:1737년, 조선 한성 반송방 야동

사망:1805년

최근작
2026년 8월 <국어과 선생님이 뽑은 연암 박지원 소설선 호질 양반전 외 1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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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조선 후기 대표적 문신이자 실학자인 연암(燕巖) 박지원의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그는 한양 서쪽 반송방에서 노론의 중진 박필균의 손자이자 박사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대대로 서인과 노론의 명문가였으며 조부 박필균은 정2품 관직에 오르면서도 붕당 정치에 휩쓸리지 않아 적이 없었다. 박지원은 어린 시절부터 체격이 건장하고 영민하며 암기력이 뛰어났다. 열여섯 살에 처사 이보천의 딸과 결혼한 후에는 장인과 처삼촌 이양천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학문에 정진했다. 장인에게는 《맹자》를 배우고 처삼촌에게서는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한 역사서와 문장론을 익히며 글쓰기의 기초를 탄탄히 다졌다. 이때 함께 공부한 처남 이재성은 평생의 문우이자 든든한 조언자가 되었다. 또한 영조의 부마이자 청나라를 다녀온 삼종형 박명원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청나라 선진 문물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는 향후 그가 실학의 핵심인 ‘북학파(北學派)’의 거두로 성장하는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다. 이후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등과 교유하며 학문의 깊이를 더했다. 특히 홍대용과 교제하며 지구 자전설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접하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천적 가치를 토론하며 견문을 넓혀나갔다. 과거에 낙방한 후 저술에 전념하던 박지원은 1780년(정조 4)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를 방문했다. 이 여행은 그의 사상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충·효·열을 강조하던 전통 도학에서 벗어나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실학에 주목했다. 자연과학과 서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인 그는 농업 기술서인 《과농소초》를 저술했다. 나아가 백성에게 이롭다면 오랑캐의 기술이라도 배워야 한다는 ‘북학’ 정신을 주장하며 명분에 치우쳤던 당시 조선 사회에 큰 화두를 던졌다. 또한 그는 기발한 문체로 양반 계층의 타락상을 날카롭게 고발한 문학가였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산문으로 조선 문단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특히 청나라 견문록인 《열하일기》에서는 현지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기존 서체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글씨체를 선보이기도 했다. 풍자와 해학이 돋보이는 그의 문장은 조선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열하일기》에 수록된 〈양반전〉, 〈허생전〉, 〈호질〉을 비롯해 〈민옹전〉, 〈광문자전〉, 〈예덕선생전〉 등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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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낭송 연암집> - 2021년 1월  더보기

“요즘에 내가 유독 관심이 가는 건, 젊은 시절의 이야기보다 늙어 가는 이야기다. 굳이 분별심을 갖고 나눌 것까지야 없지만 그래도 더 많이 마음에 와닿는다. 그래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낭송집을 기획했을 때 나는 중년 이후에 쓴 연암의 글에 끌렸다. 연암의 경우 젊은 시절 쓴 글이든 만년에 쓴 글이든 좋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다 좋다. 그럼에도 나는 연암을 대표하는 그 경쾌하고 창의적인 중년 이전의 글보다 만년의 글에서 더 치유를 받고 평화를 얻는다. 만년의 글이 치열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나이 들어서도 그 자유로움, 그 성실함, 그 따뜻함이 변하지 않아서이다. 아니 한층 더 깊어졌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연암의 중년 이후의 글을 읽으면 한층 더 마음이 맑아지면서 생에 대한 용기가 생긴다. ”(「머리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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