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신좌파 이론가.
칭화대학 중문학과 교수이자, 칭화인문사회고등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인 왕후이(汪暉)는 중국의 정치개혁 담론을 주도하는 ‘신좌파’ 이론가로 불린다. ‘신좌파’는1990년대에 중국의 친자본 노선을 비판하는 일군의 지식인들을 일컫는 말인데, 왕후이는 이들 신좌파 지식인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1990년대에 ‘중국의 길’(中國道路)을 두고 활발하게 제기된 사상 논쟁에서 신좌파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주장하는 우파와 견해를 달리하며 사회적 공정과 평등의 가치를 주류 담론에 다시금 각인시켰다.
왕후이는 1984년 남징(南京)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1988년에는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중국의 대표적인 현대문학연구자인 탕타오(唐弢) 지도하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청조의 경학 전통을 유지해 온 양주학파, 당송(唐宋) 문학·원곡(元曲)·왕궈웨이(王國維) 전문가, 태평천국 연구자, 어문학자, 루쉰 연구 및 현대문학 전문가 등 중국 전통 학문의 대가들을 학부와 석사과정의 스승으로 둔 왕후이는 문혁을 거쳐 다시 문을 연 78학번, 개혁 개방 1세대로서 사회주의 중국과 포스트 사회주의 중국에서 냉전적 학지(學知)를 내재화했을 것이다. 사상의 빈곤을 절감하며 ‘박투’해 왔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른 분명한 사상과 학문의 거처를 두고 있었던 것이니, 왕후이의 사상사 연구 작업은 그러한 탄탄한 사상과 학문의 전통 때문에 가능했다.
1996~2007년 동안 잡지 『두수』(讀書)의 주편(主編)을 맡으면서 중국 신좌파의 리더로서 중국 사상 담론계를 이끌었으며, 2013~2018년에는 제12기 전국정협위원(全國政協委員)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국제적으로도 학술적 공로를 인정받아 2013년 10월 20일,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와 함께 루카 파치올리 상(Luca Pacioli Prize)을 수상한 바 있다.
백 년 동안 ‘낙후된 상태에서 구타당한’ 중국인의 절실한 경험을 통해 우리는 ‘세계 보편의 신화’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중국은 ‘동아병부’라 불리던 약골이었던지라 서구의 ‘약방’에서 보약을 지어 먹어야 성인으로 자랄 가망이 있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기술 발전 과정에서 ‘그것의 노예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또 우리는 절대적 희화화 과정에서 ‘민주’를 받아들였으며, 대중이 침을 뱉는 과정에서 ‘자유’를 수용했다. 오늘날 현대 기술의 장관이 펼쳐지고 있다. 우리가 오유해야 할 것이 어느 시대보다 많지만 잃어야 할 것도 어느 시대보다 많은 듯하다. 떨쳐 일어난 신체는 튼실해졌지만 우리는 아직도 머리를 가누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