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 러시아 말기의 수도자이자 희대의 비선 실세. 신비주의적인 치유 능력으로 황실의 맹목적인 신임을 얻어 국정을 농단하며, 300년 역사를 지닌 로마노프 왕조를 파멸로 몰아넣고 러시아 제국의 몰락을 앞당긴 장본인이다.
그는 혈우병을 앓던 황태자를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황제 부부의 이성을 마비시켰고, 국정이 파탄 나고 민중이 굶주리는 상황에서도 권력을 사유화하며 국가 시스템을 내부에서부터 붕괴시켰다. 우리가 그의 궤적을 들여다보는 이유는, 합리적 판단을 잃고 특정 개인에 대한 맹신에 빠졌을 때 한 집단이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 뼈아프게 보여주는 완벽한 반면교사이기 때문이다.
불확실성과 불안이 팽배한 현대 사회에서, 그의 악명 높은 역사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위기의 시대일수록 우리는 구원자를 자처하는 거짓 선지자의 유혹에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가. 라스푸틴의 섬뜩한 그림자는, 깨어있는 이성과 투명한 시스템만이 맹신과 광기로부터 우리 사회를 지켜내는 최후의 보루임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