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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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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목회상담>

목회상담

2005년, 나이아가라 폭포로 여행하던 중 캐나다와 미국 사이에 자리한 싸우전드 아일랜드(Thousand Islands)를 방문한 적이 있다. 배를 타고 세인트 로렌스 강(St. Lawraence River)을 따라 흩어져 있는 천여 개의 섬들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으려 애썼던 기억이다. 어떤 섬에는 작은 오두막이 있었고, 또 어떤 섬에는 유럽식 석조 성이 웅장하게 서 있기도 했다. 사람이 사는 듯한 섬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텅 비어 보였다. 아름답게 꾸며진 작은 섬들을 감탄하며 바라보다가도, 보트와 같은 이동 수단이 없다면 섬에서 섬으로 옮겨갈 수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서로 단절되어 있다면, 결국 섬은 외로움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 장면은 종종 우리네 삶을 떠올리게 한다. 직업을 갖고 경제적으로 독립하며 살아가다 보면, 우리 역시 저마다의 성을 쌓으며 둥둥 떠 있는 섬처럼 고립되어 가는 듯하다. 어린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이웃과 어울려 노는 모습과 달리, 성인이 된 후에는 낯선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건네거나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일은 쉽지 않다. 결혼을 통해 일정 부분 고립이 줄어들 수는 있지만, 제도적 결혼이 곧 정서적 친밀감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독립을 향해 나아가지만, 정작 나이가 들어갈수록 독립이 아니라 고립 속으로 내몰리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 마치 우리의 고립과 외로움을 아셨던 듯, 예수님은 단지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만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더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시려 이 땅에 오셨음을 말씀하셨다. 나는 오늘날 교회가 바로 이 사명을 이어가야 한다고 믿는다. 섬처럼 흩어진 개인들을 공동체로 불러 모으고, 스스로 쌓아 올린 벽을 허물어 서로 관계 맺고 성장하도록 돕는 것, 이것이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다. 급속히 발전하는 AI와 다양한 기술들을 생각할 때, 교회에게 주어진 이 사명은 더욱 절실하다. 미국의 이민 교회는 이민자들에게 단순한 종교기관 이상의 역할을 감당해 왔다. 아이들에게 한국 문화를 전해주는 교육기관이자, 주중에 영어와 다른 문화를 접하며 살아가는 이민자들이 교회에 와서 한국어로 소통하고 한국 음식을 함께 나누며 소속감과 정체성을 회복하는 공간이었다. 물론 때로는 신앙보다 생존이나 사회적 필요 때문에 교회를 찾는 경우도 있어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민 교회뿐 아니라 전 세계 교회가 종교적 기능을 넘어서 돌봄과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믿는다. 예수님은 죄 사함만이 아니라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눈먼 자를 보게 하셨다. 굶주린 이들을 위해 떡과 물고기로 먹이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부활 후에도 이러한 돌봄 사역은 초대 교회를 통해 이어졌다. 사도행전 6장에서 일곱 집사가 선출된 이유도, 헬라파 과부들과 히브리파 과부들 사이의 음식 분배 문제 때문이었다. 곧, ‘더 풍성한 삶’을 위해 교회가 반드시 감당해야 할 사명 중 하나는 바로 ‘돌봄’이다. 이 돌봄의 사명을 위해 목회자를 훈련하고 교육하는 것은 신학교육에서 매우 중요한 영역이다. 실제로 미국의 한 연구에 따르면,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네 명 중 한 명은 성직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Philip S. Wang, et al., “Patterns and Correlates of Contacting Clergy for Mental Disorders in the United States,”Health Services Research 38:2 (2003), 647. 고 한다. 연구자들은 성직자가 여전히 정신건강 돌봄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으며, 목회자가 질환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 전문 의료인과 협력할 수 있는 개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한국에서도 오랜 전통을 지닌 심방 문화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최근 보건복지부가 상담사 제도 법제화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데, 한국목회상담협회를 포함한 종교계 단체들에서 이루어지는 돌봄을 평가절하하지 않는 지혜와 통찰이 있길 바라본다. 목회상담은 1925년 미국에서 시작된 이후 다양한 형태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왔다. 정푸름은 이를 “목회상담(pastoral counseling), 목회신학(pastoral theology), 목회심리치료(patoral psychotherapy), 임상목회상담(CPE), 그리고 목회돌봄(pastoral care)으로 나눌 수 있다” 정푸름, “탈근대주의 목회상담과 상호성에 관한 연구,” 「목회와상담」 34 (2020), 400. 각 용어에 대한 설명은 정푸름의 논문을 참고하시오. 고 소개하기도 한다. 목회돌봄이 인간돌봄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이해와 지식을 전달하는 입문 단계라면[이런 의미에서 개별 교회들에서도 소그룹 지도자들이 돌봄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갖출 수 있도록 교육 과정을 제공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 본다], 목회상담이나 목회심리치료는 교회 목회를 전문적으로 하지 않고 각 교단과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목회자로서의 신분은 유지하지만, 상담을 전문적으로 하기로 선택한 사람들을 훈련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재 한국목회상담협회는 신학을 전공한 목회자를 ‘목회상담사’로, 비전공자를 ‘기독교상담사’로 구분하고 있다. 이 책은 그중에서도 가장 기초적인 단계인 목회돌봄에 초점을 두고 있다. 목회상담과 목회심리치료를 더 깊이 배우고자 한다면, 이 책을 바탕으로 적절한 교육기관에서 훈련과 감독 수련을 이어갈 수 있길 권한다. 이 책은 총 8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목회신학의 기초와, 안톤 보이슨의 삶, 교회 돌봄에서의 윤리적 고려, 신학적 성찰, 경청과 공감의 기술, 목회상담의 패러다임 확장, 그리고 포스트모던 시대의 목회상담을 위한 제언까지 폭넓게 다루었다. 1장과 2장이 다소 이론적이라 느껴진다면, 3장부터 읽어도 좋고, 실제 기술에 흥미가 있다면 5장과 6장을 먼저 시작해도 무방하다. 각 장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들의 이해함과 민감성을 키울 수 있기를,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사람들을 섬기는 길에 작은 안내서가 될 수 있길 소망한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수고해주신 출판사 박영사와 교정에 정성을 다해주신 김판임 교수님 그리고 조영은 대리님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늘 변함없는 정서적 지지로 함께해 준 남편 문영석 씨, 그리고 나에게 공동체의 기쁨을 경험케 해주며 돌봄의 실천을 살아내도록 허락해주는 ‘기쁨의 공동체(community of Joy)’의 모든 분들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무엇보다 더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돌봄에 빛도 없이 소리도 없이 헌신해 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풍성한 삶으로 인도함 받기를 바라며 부족함이 많은 글을 내놓습니다. 2025년 11월 - 머리말

성과 사랑

“성과 사랑”이란 교양핵심 과목은 정원이 100명인 교과목으로 우리 대학에서 채플을 제외하고 수강생이 가장 많이 모이는 교과목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양질의 수업을 위해서 정원 감축에 대해서 교양 대학에 건의해 보기도 했지만, 나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 학기 동안 학생들과 교류하며 학생들의 이름을 외우고 눈을 마주치며 수업하기를 선호하는 나에게 100명이라는 학생 수는 다소 많다 여겨지지만, 대학 생활의 꽃이 타 전공 학생들을 만날 수 있는 교양 수업이란 점을 고려한다면, 100명 정원을 유지하는 것도 학생들이 이 수업에서 가져갈 수 있는 유익 중의 하나가 아니겠느냐고 나의 인식을 전환하며 수업을 진행해 가고 있다. 30명이 모이지 않아서 폐강의 위기를 맞는 교양 과목들이 많이 있다는 걸 고려할 때, 2020년부터 이 과목을 가르친 이후, 거의 매 학기 90명을 훌쩍 넘는 학생들이 이 강의를 선택하고 있다는 것은 이 교과목이 학생들 가운데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사실, 내가 이 교과목을 가르치기 전부터 이 과목은 매 학기 거의 100명의 수강생이 선택하는 교과목이었고, 현재도 내가 가르치는 분반 외에 분반 하나가 더 운영되고 있으니 재학생들이 사랑하는 교과목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 학생은 보고서에서 “교양 과목의 ‘성과 사랑’이라고 하면 다들 데이트 과제를 떠올릴 것이다. 나도 에브리타임(이후-에타)에서 그 과제와 관련된 글만 수없이 봐 왔는데...”라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이 과목이 에타에서 피해야 할 ‘페미 과목’으로 회자하지 않고, 이 교과목을 택한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과제 중 하나로 알려졌다니 다행이라는 마음도 들었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이전부터, 이 교과목은 어렵지 않게 수강생을 모을 수 있었음을 고려할 때, 이 교과목이 인기 교과목으로 자리매김한 이유를 생각해 보면 ‘성(性)’이란 주제와 ‘사랑’이라는 주제를 제목으로 하고 있음이 가장 우선이 아닐까 생각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막 성인기의 문턱에 들어선 학생들에게 이 두 주제는 흥미를 끌 만하다. 취업 시장의 어려움으로 최근 대학 생활은 낭만보다 치열함이 더 팽배하다는 의견과 초혼 연령이 30대 이후로 미루어지면서 20대에 이루어야 할 과업으로 여겨지던 ‘연애’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 되었다는 지적을 인정한다. 동시에 ‘성(性)’과 ‘사랑’이라는 이 두 주제는 20대 초반 ~ 중반의 학생들이 탐색하고 싶은 의지를 갖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학생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학기 후반부 사랑과 결혼 등의 주제를 다루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 수업에서 상당 부분 “성(性)”을 다루게 된다. 하지만, 이 수업에서 다루는 성은 ‘sex’라기보다는 ‘gender’라는 것을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젠더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후에 더 이야기하기로 하자.] 나는 첫 시간 학생들에게 이 수업을 소개하면서 이 수업의 목표를 “인식의 지평선 넓히기”라고 소개한다. 대학 재학 중 수강했던 교양 수업을 통해서 그동안 생각해 보지 못했던 부분을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면, 또 평소 당연하다 생각하며 살던 삶의 태도와 자기가 안다고 여겼던 지식의 근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게 된다면 이 수업이 목표하는 바는 어느 정도 달성했다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공부란 곧 자기 파괴다”라고 정의한 지바 마사야와이 수업이 목표하는 바는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공부라고 하면 무언가를 외워서 시험지에 맞는 답을 작성하는 것이라 흔히들 생각하지만, 지바 마사야는 오히려 공부란 자기를 파괴하는 것이라고정의하면서, 공부가 획득이 아니라 상실의 과정임을 『공부의 철학(2017)』에서 밝히고 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 길든 한국 학생들에게 공부가 획득이란 것은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다. 은행에 돈을 저축하듯, 학생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입시 시험을 위해 차곡차곡 지식을 쌓아 올린다. 이런 패러다임에서 공부는 획득이고 저장이다. 그런데 공부가 상실이라니? 대체 무얼 상실해야 하는 거지? 이 수업은 여성주의에 바탕을 두고 젠더 평등을 위해 동참하고 연대하는 개인을 길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다시 말해,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것이 이 수업이 지향하는 바다.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한국 사회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공기만큼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젠더에 대한 생각과 성역할고정관념을 인지하고 바꿔나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익숙한 젠더에 대한 생각은 가부장적인 이데올로기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 가부장적 이념을 바탕으로 남성중심적으로 형성된 젠더 개념은 여성에 대한 남자의 지배를 정당화했을 뿐 아니라 개인의 개성이 꽃피우지 못하게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예전의 자기를 상실할 수 있길 바라본다. 새로운 자기가 만들어지기 위해서 옛 자기를 파괴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흑인 여성 교육학자인 벨 훅스(bell hooks)의 Teaching to Transgress (1994)라는 책 제목 역시 순종하고 순응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실천하기 위한 교육은 위반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라 이야기하고 있는데 자기 파괴로서의 공부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보통 교육은 정보를 주고 그 정보를 쌓아서 순응하고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은행식 저축과 같이 지식을 쌓는 교육을 통해서 비판적인 사상가(critical thinker)를 기대할 수 없음을 지적하며, 저항으로서의 교육이 이루어질 때 순응하고 따르는 사람 외에 비판하고 건설하는 사람이 만들어질 수 있음을 주장한다. 전통을 고수하고 지키는 것과 함께 창조와 변혁이 있을 때 사회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교육은 순응하는 사람을 만들어 낼 뿐 아니라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를 위해 교실에서 가르침은 교수자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교실 안에 모든 주체가 학습의 과정에 참여할 때 배움이 일어난다. 훅스는 가르침을 수행적인 행위(performative act)로 정의 내리면서, 교수자는 학습자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해야 하며, 나아가 학생들이 배움의 과정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끌어내는 촉매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기파괴로서의 배움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힘을 배양해주는 교육이 이루어지는 교실에서 교수자의 역할은 가르치는 것보다, 학습자들 간에 역동적인 교류가 일어날 수 있도록 촉매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수업을 통해서 배움이 일어나기를 소망한다면, 가르치는 교수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함과 동시에 학습자는 스스로 배움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다른 학습자들의 경험과 생각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번 학기 자기 파괴로서의 배움이 일어날 수 있길 바라며, 그동안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순응하던 많은 부분을 곰곰이 생각해 보자. 주변 사람들로부터의 인정을 받기 원하는 우리의 태생적 욕구로 인해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문화 전반적으로 인정되고 칭찬받는 모습을 내면화하면서,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며 자기다움을 생각해 보지 않은 학생들이 진정으로 자신은 누구이며,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다. ‘나다움’을 추구하며 꽃피우기 위해서, 내가 나 되도록 하지 못 하게 했던, 그것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것들을 상실하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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