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이미지 또는 표상'이라는 다소 독특한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내가 한국과 첫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85년의 아주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이다. 그것은 파리 국립도서관 지하 열람실에서 미지의 나라에 대한 자료를 찾으면서부터인데, 나는 한국으로 첫발을 내딛기 직전인 당시,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전무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그날은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1월의 어느 날이었다), 오늘날에는 일부 폐쇄된 그곳 고문서 열람실에서 은은한 녹색 불빛과 고요한 정적을 벗삼아, 열람된 지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난, 수시대에 걸쳐 출판된 붉은 가죽 장정의 낡은 책 한 아름과 참고도서 수십 권을 통하여 한국이라는 신비한 나라와 만나게 되었다. 우연한 나의 관심과 호기심에 의해서, 뒤 알드, 뒤크로, 바라, 달레, 부르다레, 쿠랑 등 잘 알려지지 않거나 잊혀진 이름들이 회색 먼지를 털고 깊은 잠으로부터 깨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한 자리에서 만나 서서히 서로 얽히면서, 저 머나먼 시간 속으로의 여행에 의해 되살아난 언어의 마술적인 힘으로 나를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의 빛과 그림자 속으로 이끌어갔다.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고, 한 쪽 한 쪽 책장을 넘김에 따라 프랑스와는 매우 다른 한국이라는 땅!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
<착한 미개인 동양의 현자>를 쓰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매섭고 혹독하게 추운 2월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나는 서울에 도착했다. 그리고 당시 주한 프랑스인이나 친불 한국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이전 시대에 쓰여진 글들에 대해 이들이 얼마나 무지한지 알게 되었다. 그때 이 텍스트들에 대한 이야기를 차분하고 조심스럽게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1986년 한불외교 수립 100주년 기념으로 〈르 몽드〉지에 실린 기사에서 한국학을 하는 프랑스인들이 한국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사실은 그렇지 않으며, 단지 전통과의 단절이 일어난 것일 뿐이라는 점을 알려주고 싶었다.
왜 하필 프랑스에서 본 한국인인가 그리고 프랑스인이 쓴 글이 차지하는 비중은?
프랑스는 서양에서 과거 한국에 관한 자료(1950년 이전 자료)와 가장 오래된 자료(1254년부터)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으로 프랑스인들이 일찍이 이 지역을 대거 점하고(중국의 예수회, 해외선교단, 고종 고문단 등)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식민지주의식 접근과는 반대되는 방식으로 접근한 인본주의자들이 쓴 다양한 글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 프랑스 자료의 또 다른 장점이기도 하다.
이들은 제국주의적 정복 야욕을 갖고 있던 선교단, 군인, 외교관, 엔지니어들처럼 직접적으로 한국을 만난 것이라기보다는 좀더 간접적인 방식의 접촉을 했었다. 이들은 당시 문학적 독창성으로 인정을 받고 있던 철학자나 시인들로서, 당대인들이 관심을 갖고 있던, 문화적 차이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라는 틀 안에서 한반도에 대한 다양한 의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이렇듯 다양하면서도 양질의 자료를 가장 많이 확보하고 있는 프랑스는 (프랑스는 하멜 표류기의 번역과 같이 출판번역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국가이기도 하다) 통시적인 관점에서 본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유럽에서는 가장 풍부하고 가장 완전한 형태로 제공할 수 있는 나라이다.
이 책은 절대 한국에 대한 역사적 증언이 아니다(물론 원문인 불어판은 한국의 역사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지만). 또한 한국과 프랑스의 관계에 대한 책도 아니다(물론 중국을 매개로 한 양국관계가 서술되기는 했지만). 이 책은 한국을 말하는 프랑스에 관한 에세이이며, 좀더 구체적으로는 한국이라는 타자를 통해 스스로를 발견해가는 프랑스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