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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최환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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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대한민국 경제정책의 어제와 오늘>

마르크스 사상 비판

세상에서는 지금 “자유 vs 평등”의 대립이 치열하다. 치열하다 못해 양자의 충돌로 인하여 세상이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자유의 종류는 종교, 사상, 집회, 결사, 표현의 자유 등 다양하다. 이때 자유 중에서 가장 상위에 있는 자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소유의 자유이 다. 이 소유의 자유는 ‘정신’의 활동을 촉진시킨다. 헤겔 『법 철학』에 의하면, ‘정신’이 어떤 ‘대상’을 소유할 때, 여기에서 ‘정신’은 창의성을 발휘한다. 그리고 그 창의성의 다른 말은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소유의 자유가 펼쳐진 곳이 바로 시장이다. 이 시장에서 마음껏 이윤추구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이 시장경제이고, 시장경제는 소유의 자유가 보장된 곳이다. 이것을 정리해 낸 학자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다. 이 소유의 자유가 있는 곳에 풍요로움이 넘쳐난다. 이러한 체제를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라고 한다. 이 산업혁명 의 진원지인 영국은 이때 해가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그 정신을 미국이 이어받고 있다. 평등에도 여러 종류의 평등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으뜸 되는 평등은 소유의 평등이다. 이것이 오늘날에는 경제적 평등 혹은 경제 민주화라고 말하며, 이들이 주장하는 민주주의를 민중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이것의 다른 말이 곧 민중 민주주의이며, 그 이념은 공산주의이다. 이들이 완전히 평등이 실현된 공산주의를 꿈꾼다. 인류의 자유는 과학기술에 기반한 산업혁명으로 꽃피어났다. 인류를 괴롭히던 가난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그런데 필요악과 같이 빈부격차가 생겨난 것이다. 여기에 평등사상이 마치 지상낙원 인 것처럼 비집고 들어왔는데, 그들은 가난한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경제민주주의를 부르짖는다. 그들이 믿는 구석은 부르주아지 보 다 프롤레타리아의 숫자가 월등히 많다는 것이다. 이 양자를 분리시켜내면, 정권을 창출할 수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정권을 창출한 후, 그 다음의 작업은 법률을 바꾸고, 국가의 펀드를 이용하여 개인들이 가진 생산수단(기업)을 빼앗는 것인데, 처음에는 공동지배를 가장하지만 궁극의 목적은 기업을 빼앗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고착시키지, 공산주의로 가지 않는다. 이것이 중국과 러시아의 모습이다. 이러한 모델이 다른 나라에 적용될 경우, 그 나라의 경제는 큰 타격을 입는다. 국가가 이와 같이 개 인의 소유의 자유를 침탈한 나라의 경제는 이렇게 해서 망가지는 것이다. 지금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이 공산주의의 공격을 받고 있다. 2025. 7. 27. - 머리말

박정희의 산업화 유신

대한민국은 이승만과 박정희로 인해 탄생하였다. 한 개인의 역할이 그렇게 컸던 것이다. 세계 어느 위인과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을 만치 위대하였다. 이 둘의 특성은 애국심이었는데, 그 애국심이 이들의 영혼을 삼켜 버렸다. 이승만은 기독교 정신에 의해 빗어진 사 람이다. 박정희의 애국심이 신비에 쌓여있는데, 일제치하에서의 가난, 어린 시절의 신앙심(?), 애국을 기반으로 삼는 군인정신이 그 근원이지 않을까라고 추정해본다. 이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모두 청렴결백하고 검소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이 우리나라에 기독교정신 에 따라 공산주의와 싸워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의 대한민국을 건설하였고, 박정희는 이 기반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그 위에 대 한민국의 산업화를 이룩하였다. 1,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 박정희는 그의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애국심을 가난과의 싸움에 바쳤다. 일제치하에서 겪은 가난이 이렇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5.16혁명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서독 광부와 간호사들을 방문한 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저도 열심히 할테니 함께 열심히 하여 가난을 후손에게 물려주지 맙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 약속을 그의 생애 내내 끝까지 지켰다. 그는 정주영 회장에게 조선소를 하라고 말하면서, “당신이나 나나 나라라는 제단에 목숨을 바쳤쟎소?”라고 말하였는데, 이렇게 무의식 중에 나타나는 발언이 진정한 발언이다. 이때 박정희의 탁월함은 산업화의 모든 유익을 국가가 취하지 않고, 기업인들에게 돌렸다는 것이다. 그는 오로지 국민들의 가난해결을 염두에 두었고, 국민들의 일자리 창출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였다. 이것이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그의 탁월함이었다. 그는 대통령 임기 내내 매월 개최되는 <수출진흥확대회의>에 참여하여 기업인들과 함께 몸을 부대끼며 수출진흥에 온 몸을 바쳤다. 박정희의 애국심이 이때 기업인들과 공무원들에게도 흘러내려갔다. 그는 수출이 국민들의 가난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수출진흥을 위해서 그의 몸을 아낌없이 불살랐다. 이것이 1,2차 경제개발계획 기간 동안의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이었다. 시월유신 박 대통령은 산업현장의 선두에서 직접 진두지휘를 하다보니, 경제전문가가 되어갔다. 그러는 중 그는 경공업에서 한계를 인식하였다. 중공업으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나라는 여기에 더하여서 안보의 문제까지 겹쳐있었다. 이때 오원철이라는 탁월한 경제책사가 출현하였는데, 그는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결합한 <공업구조개편론>을 제시하였다.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략이 제시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통령 중임제였다. 박대통령은 여기에서도 결단을 하였다. 산업화를 위해 삼선개헌과 시월유신을 단행한 것이다. 시월유신은 1972.10.17. 국민투표를 통해 실행되었고, 정적들의 극심한 반발로 인해 또 다시 1975.2.12. 국민투표를 통해 재신임을 받았다. 산업화 유신 : 3,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이 시월유신의 결과 3차·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진행된 것이다. 우리는 이 시월유신의 명칭을 “산업화 유신”으로 바꾸어 불러야 한다.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중공업과 방위산업이 이때 모두 출현하였다. 대한민국의 산업화가 이때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의 30대 기업이 모두 출현하였다. 시월유신으로 세계 꼴찌에서 두 번째이던 경제가 10위권의 경제규모가 되었으며, 5위권의 방위산업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시월유신은 대한민국의 산업혁명이다. 시월유신 없는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월유신은 이러한 관점 에서 먼저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박정희의 독재는 산업화를 위해 행해진 유신독재였다. 그의 정적들은 공산·사회주의 사상으로 박정희를 대항하였다. 그래서 독재가 아니면, 그것을 제압할 수가 없었다. 이 당시 독재는 필요악이었다. 박정희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하면서, 그 비난을 감수하고 산업화 유신을 단행하였다. 그가 독재자라는 오명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그는 소위 애국심의 일환으로 이 시월유신을 결단했던 것이다. 10.26에서 5.18까지 이 시월유신 독재가 정치적 문제를 야기했다. 박정희는 분명히 유신헌법에 대해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그의 정적들은 시월유신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박정희는 10.26사태로 김재규에 의해 시해를 당했는데, 유신 독재의 문제가 있었다. 박정희 최대 정적은 김대중이었는데, 그는 청년 때 남로당으로 편입된 신민당 목포 청년부위원장이었다. 그는 시월유신이 선포되자 해외에서 한민통(조총련 산하)의 대표가 되어 유신반대 운동을 하였다. 김대중 뒤에는 항상 사회주의자라는 색깔논쟁이 따라 다녔으며, 많은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이 그의 사상에 현혹되었다. 당시 박정희를 대적하는 이들은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자들이었는데, 그들은 박정희의 산업화를 “나라를 자본주의에 팔아먹는 매판자본”이라고 선동하였으며,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독재를 한다”고 선동하였다. 그 결과 일어난 것이 광주 5.18이었다. 산업화 대통령, 박정희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풍요와 번영을 누리며 사는 많은 사람들은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해 감사를 하여야 한다. 이 둘이 아니었으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내의 사회주의자들은 대한민국에서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여 이둘을 폄훼한다. 이들은 이승만을 소개할 때 오직 4.15 부정선거만을 말하며, 박정희는 시월유신 독재만을 그 전부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승만과 박정희 이 두 사람을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 이승만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수립되었으며, 박정희는 그 기반 위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산업화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이 둘을 폄훼하며, 논리를 전개한다. 오늘날에는 결국 이 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우리나라 자유민주주의 체제수호의 첫걸음이 되어있다.

초기 분석철학과 논리실증주의

실존주의나 구조주의 대륙중심의 철학이면서 합리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면, 영국의 경험론은 이제 논리실증주의를 거쳐 분석철 학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영국의 경험론은 철저히 관찰과 실험 등의 경험 자료를 바탕으로 법칙을 발견해 낸다. 이제 분석철학에서는 이러한 관찰 등에 의한 경험대신에 그 자리에 언어가 자리잡게 된다. 언어에는 선험성이 있는데, 이 언어가 이러한 보이지 않는 세계 를 지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세계와 언어의 세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언어를 기반으로 해서 외부세계의 원리를 발견해 낼 수 있다. 이 외부세계는 초기 분석철학에서는 철저히 경험세계였으나, 비트겐슈타인의 분석철학에 이르러서 형이상학적 문제들이 언어 속에 대거 내재함이 부각되었다. 과연 여기에도 지시체가 존재하는가? 이것이 궁극적인 분석철학의 물음인 것이다. 이 지시체가 존재한다면, 종교의 본질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초기분석철학은 수학과 언어가 결합을 하며, 여기에서 원자적 논리주의 또는 논리실증주의로 발전을 하고, 더 나아가 언어분석철학으로 발전한다. 고들로프 프레게 프레게는 언어와 수학의 관계를 발견해 내었다. 수학은 언어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언어는 수학적 기호로 표시될 수 있 다. 우리의 언어 속에는 수학적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수학의 엄밀함을 통해서 우리는 자연법칙을 발견해 내는데, 우리의 언어에 서 법칙을 발견해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언어사용을 수학화 한다는 것은 모든 세계와 이에 대한 것을 수학적 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프레게 『개념표기법』의 갖는 의미이다. 이렇게 수를 연구한 프레게는 『산수의 기초』에서 수의 본질을 밝히고자 한다. 수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 수는 개념 속에 들어가서 그 개념에 속한 모든 존재들을 그 수만큼 확장시킨다. 이것이 수가 가진 가장 큰 의미이다. 수 개념은 모든 대상들 속에서 그 대상들의 집 합을 나타낸다. 만일 우리가 실재론자(개념이 하늘에 먼저 실재로서 존재)라면, 이 수는 창조에 관여하고 있다. 프레게는 이 수를 고유 명을 가진 구체적 존재라고까지 말한다. 이 수가 만일 대상과 같은 존재라면, 그 대상의 지시체는 어디에 있을까? 프레게는 그 대상의 지시체는 모든 개념들의 집합 속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지시체가 피타고라스가 말하는 것처럼 예지계에 존재한다면, 이 수는 신 의 세상창조의 도구인 셈이다. 프레게는 『함수와 개념』을 통해 우리의 언어사용을 수학적으로 표기한다. 그 결과 수학적 표현에서의 함수가 우리의 언어에서는 개념 으로 표기된 술어이며, 일반적으로 이것은 보통명사와 추상명사이다. 수학에서의 논항이 언어에서 고유명사로 표현되는 대상이다. 이 렇게 우리의 언어사용의 문장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면, 우리 언어 이면의 실체가 모두 드러난다. 이 경우, 고유명사의 지시체는 우리의 경험 세계에서 모두 드러난다. 그런데, 문제는 개념을 말하는 술어 부분의 지시체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프레게는 개념의 지시체는 그 러한 존재의 모두라고 말한다. 예컨대, 어떤 고양이의 지시체는 모든 고양이들이다. 그런데, 고대철학자들은 이 개념의 지시체도 예지 계에서 찾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양이의 지시체가 보편자로서 예지계에 있다고 하였다. 프레게는 『뜻과 지시체』에서 이제 문장 전체의 지시체는 존재하는가? 그것은 당연히 존재한다. 그 문장이 의미하는 사건이 존재하면, 그것이 바로 그 지시체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시 다른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한 사건을 확인할 수 없는 제3의 영역이 있다는 것 이다. 특히 형이상학적 이슈들이 대부분 그러하다. 그는 우리의 언어에서 이렇게 형이상학적 영역들을 발견해낸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의 언어에 선험성이 있어서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이제 예지계 혹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논증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 러셀은 원래 실재론자였다. 원래의 전통적인 실재론은 보편자가 예지계에 실재한다는 이론을 말한다. 즉 고유명사의 지시체가 땅에 있는 것처럼, 보통명사와 추상명사가 지시하는 존재자(지시체)가 하늘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론으로 과학을 전개하기는 어 려웠다. 그는 신실재론으로 나아갔는데, 그 실재를 예지계로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속의 사물들 속에 그 지시체가 존재한다 고 말한 것이다. 예컨대,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사실상 실재론자들로서 모든 보통명사와 추상명사의 보편자가 하늘에 있으며, 모 든 보통명사 등의 개별적 존재자들은 그 보편자의 분유물이다. 이제 이것을 확장하면 신실재론과 일치한다. 이 세계의 사물들 이면에 하늘로부터 분유된 이러한 보편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계 속의 사물들도 실재한다. 이 실재들의 관계를 발견하는 것이 과학이다. 러셀의 신실재론은 실재가 만물에 퍼져있기 때문에 다원론적 입장이다. 러셀은 이러한 다원론적 믿음과 이들의 관계성에 대한 법칙을 발견하여, 이들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연계하고자 하였다.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은 "세계와 언어는 논리적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러셀이나 비트겐슈타인이나 우리의 언어의 구조가 세계의 구조와 일치한다는 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러다보니 언어가 바로 형이상학 세계 인식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러셀의 이러 한 야심찬 시도는 실패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의 언어 속에는 형이상학적 실체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러셀의 후반부 철학은 논리적 원자론에서 언어철학으로 전회가 이루어진다. 러셀의 언어철학은 현대 분석철학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언어를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로 보지 않고, 논리적 분석을 통해 언어와 세 계의 관계를 밝히고자 했다. 그러는 가운데 러셀은 우리의 언어에 언어의 유형 혹은 언어의 계층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신약성 경에서 어떤 그레데인 예언자가 "모든 그레데인은 다 거짓말쟁이이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 예언은 맞는 예언일까? 또 하 나의 예화는 한 이발사가 "집에서 스스로 수염을 깎지 않는 사람의 수염만 깎아준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렇다면, 이발사 자신의 수염 은 누가 깎을까? 이 양자는 지금 언어 계층이론으로 답을 할 수 있다. 이들은 지금 자신들보다 한 단계 아래의 계층의 사실을 말한 것 이다. 이것을 통해서 러셀은 언어에는 이와 같이 계층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렇게 우리의 언어는 1차 언어, 2차 언어, 3차 언어 등의 계층으로 무한히 올라갈 수 있다. 우리는 도덕적 언어와 종교적 언어도 이러한 언어의 계층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러셀은 언어로 구성된 문장을 통해 지각적 인식에 관하여 다룬다. 우리의 명제는 우리가 대상으로서 확인할 수 있는 '기본명제'에 기반 하여 시작되는데, 여기에 말하는 자의 기본명제에 대한 화자의 심리적 태도인 명제태도가 삽입된다. 그러면서 상대방에게도 동일한 믿음을 유발한다. 이것을 통해 이러한 판단들을 근거로 하여서 외적인 세계에 대한 '논리적 추론'이 가능하다. 이것을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에 대한 표적들이 출현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러셀은 우리의 모든 언어가 유의미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각각의 단어 마다 그 검증자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의 검증자는 지시체와는 약간 다른 개념인데, 그 존재를 확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구사하는 모든 단어는 상대방도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해지면, 우리는 이제 언어를 통해 외적인 세계에 대한 논리적 추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루돌프 카르납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에 의하면, 언어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의 언어 속의 원자명제는 이 세계의 원자적 사실들을 지시한다. 이러한 논의는 프레게의 논문 "의미와 지시체에 대하여"(1892)에서 출발하여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의 철학"(1918-1919)에서 절정 을 이루고, 이제 카르납의 『세계의 논리적 구성』(1928)에 이른다. 카르납은 그 구성을 전면적으로 완성해 보려는 시도를 하였다. 카르 납은 세계의 모든 개념과 지식을 '논리적 언어'를 통해 '경험적' 자료로 환원할 수 있다고 주장을 한다. 카르납의 철학은 철학을 하나의 엄밀한 학문으로서 확립하는 일이었다. 카르납에게 있어서 참 지식은 '예측 가능한 지식'인데, 이것은 오직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서만 나온다. 그리고 이러한 기반위에 프레게 등의 논리주의가 결합된 것이다. 이것이 논리실증주의 혹은 논리경험주의)이다. 이렇게 카르납의 논리실증주의는 경험주의와 논리주의의 결합인데, 경험주의적 요소는 우리의 모든 지식은 경험 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논리주의적 요소는 철학적 명제는 형식 논리나 수학적 논리를 통해 분석 가능해야 한다는 입장 이다. 이 둘의 결합을 통해, 과학처럼 명료하고 검증 가능한 철학을 지향한다. 카르납의 논리실증주의에서 '지식'은 '법칙'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떤 '지식'이 창출되려면, 그 지식은 이제 '검증 가능'하여야 한다. 즉 그 지식이 현실에서 '경험'되어야 한다. 그래야 이 지식으로 또 다른 사실을 '예측'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검증가능한 용어들로 명 제가 구성되어야 그 명제는 법칙적인 위상을 갖추게 된다. 카르납은 이제 언어를 통한 법칙적인 명제구성을 위해 언어사용에서 일정 한 '검증기준'을 가지고 무의미한 명제들을 제거시켜야만 했다. 카르납이 우리의 언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기준은 '새로운 지 식'의 창출과 관련하여서 '유의미'와 '무의미'를 구분하였다. 그에게 '유의미'한 것은 '논리적'이어야 하고, '경험 가능'하여야 했다. 즉 과 학적 인식에 가능한 것들만을 유의미한 명제로 파악하고, 이것을 '인식적 의미'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외의 '형이상학적, 혹은 도덕적' 지식과 관련한 모든 명제들에 대해서는 '감성적 의미'라고 하였다. 이것은 자연과학적 발견을 위해서는 '무의미'한 명제였다. 카르납은 명제를 검증가능한 명제로 구성하고자 하였다. 우리의 언어가 법칙산출적인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언어에서 형이상학 적 용어를 현실에서 검증가능한 용어로 바꾸어야 하며, 그 형이상학적인 용어는 명제 가운데 있으면 안 된다. 이것이 곧 형이상학 제 거 프로그램이었다. 카르납은 형이상학적 명제들에 대해, 그것들은 정서적 태도를 표현하고 있으면서도 이론을 표현하는 옷을 입음으 로써, 과학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고차원의 이론적 내용을 제공하는 것처럼 사람을 속이고 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사이비 문제 들에 대한 논쟁으로 인생을 낭비하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그래서 형이상학을 학문의 영역에서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는 형이상학적 책들을 무의미한 헛소리의 나열에 불과하다고 말하였다. 그러한 용어는 학문의 세계에서는 제거되어야 한다. 결국 카르납의 논리실증주의는 그의 과학철학으로 귀착되었다. 그는 그의 『과학철학 입문』을 통해서 통일과학을 추구하였다. 그에 의 하면, 이 세계는 아주 강한 인과구조로 짜여져 있다. 그리고 그래야만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 리의 언어를 법칙적으로 전환하면, 이 세계를 논리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철학에서 형이상학을 폐기하 는 학문으로 나타났으며, 카르납의 이러한 시도는 결국 과학을 모든 학문의 꼭대기에 올려 놓으려한 나머지 지식의 상하가 전도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물질만능주의가 되어 학문세계에서 정신을 폐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엘프리드 줄스 에이어 에이어는 카르납의 논리실증주의를 극단으로 몰아갔다. 그는 그의 『언어, 진리, 논리(1936)』에서 논리실증주의의 핵심내용인 의미의 기준을 주장하면서, 여기에 형이상학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에이어는 의미 있는 진술이 되기 위해서는 경험적으로 검증(확인) 가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과학적 진술은 경험적 관찰을 통 해 검증 가능하므로 의미 있지만, 형이상학적 명제(예: 신의 존재, 자유의지)는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없으므로 '의미 없다'고 본다. 에 이어는 특히 "의미 없음"이라는 표현을 "거짓이거나 참이 아님"이 아니라 아예 참/거짓을 판단할 수 없다는 뜻으로 쓴다. 형이상학은 검증 불가능한 명제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언어의 논리적 분석을 통해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윤리와 미학에서 사 용되는 명제는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화자 자신의 감정이나 태도를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에이어도 또한 경험명제와 종합명제에 의한 세계구성이라는 목표를 추구하였다. 이때에도 형이상학적 명제는 제거되어야 한다고 말 한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경험명제 이면에는 형이상학적 명제가 존재한다. 그래서 그 형이상학적 명제가 그 각각의 경험명제를 지배 하고 있다. 예컨대, 대한민국은 이승만이라는 자유주의자를 좇아 자유대한민국을 설립하였다. 각 사람 마음 안에 있는 자유라는 형이 상학적 명제가 이승만을 선택하였으며, 오늘날 자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산출한 것이다. 반면, 북한은 김일성이라는 공산주의자를 지도자로 선출함으로 공산국가가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각 사람 마음에 있는 자유의 이념이 자유진영을 설 립하였다. 물리적 세계구성은 이렇게 각 사람 마음에 있는 형이상학적 명제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초기 분석철학은 이와 같이 논리실증주의와 혼재되어 있었다. 이때, 어떤 사람은 논리실증주의 철학을 이단철학으로까지 바라보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의 취지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논리실증주의도 또한 분석철학 의 일환으로 보기도 한다. 어찌되었건 이 양자는 모두 우리의 언어는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언어에 대한 연 구를 통해 형이상학적 세계의 신비를 파헤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2025. 5. 5 - 머리말

칸트 철학

오늘날 진정한 의미에서의 철학은 형이상학 세계를 입증가능하게 접근한 데카르트의 근세철학에서 시작되었는데, 칸트는 이 근세철 학의 정점에 서 있다. 그리고 칸트의 철학은 헤겔을 비롯해서 그 후대의 모든 근현대 철학자들의 학문적 바탕이 되었다. 결국 근현대 철학은 칸트의 철학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모든 현대철학의 용어와 학문적 바탕이 결국 칸트 철학이다. 그래서 칸트 철학을 알지 못하 면, 현대철학을 접근할 수가 없다. 순수이성비판 칸트는 그의 『순수이성비판』 서론에서 진정한 의미의 형이상학은 논리학이며, 자신의 철학은 논리학이라고 말한다. 원래 철학은 형이 상학이다. 형이상학의 세계를 논증으로 밝혀주지 않으면, 거기에는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정신을 부인하면 그 것은 사이비철학이다. 칸트의 세 비판서에 의해 이러한 내용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논리학이다. 형이상학 의 세계를 우리 인간의 정신에 설계된 선험성을 기반으로 추적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형이상학적 세계를 이렇게 논증으로 밝혀내는 것이다. 칸트는 먼저 "우리는 어떻게 대상을 인식하는가?"에서부터 시작한다. 칸트는 "표상-직관-현상"으로 이것을 설명한다. 우리가 어떤 대 상을 보면, 그 대상은 우리 안에 표상(representation)으로 들어온다. 표상은 의식 속에 있는 모든 것이다. 이것이 이제 내 안에서 시 간과 공간의 방식으로 개별적·직접적으로 주어지는데, 그것을 직관(intuition)이라고 한다. 이 직관은 우리 안에 이미지로 남아 있다 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생각을 할 때, 내 정신 속에 현상(appearance)을 한다. 이때 직관의 모든 행위는 "공간과 시간" 안에서 이것을 한다. 공간과 시간을 이해하는 틀이 이미 내 안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공간의 원리는 기하학이며, 시간의 원리는 산수학인데, 이 지식 이 이미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다. 우리 정신(주관)은 공간과 시간을 대상에 적용시켜서 내 안에 그 대상을 현상해낸 것이다. 공간과 시 간은 우리 내적 감관의 형식이다. 우리의 정신은 공간과 시간을 산출하여 사물에 부착을 시켜서 우리 안에 현상으로 떠오르게 한다. 칸트는 이 행위를 하는 이성의 능력을 감성이라고 한다. 이때 칸트는 시간을 분석하면서 이것은 '물 자체'(신)는 아닌데, 물자체에 부속 된 것이라고 말한다. 즉 조물주는 시간을 통해 창조를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이 사유행위를 할 때, 어떤 사물이나 사건은 이렇게 우리의 정신 속에 현상하여 나타난다. 이때 우리의 정신은 이렇게 감 성의 기능을 통해 재료로 주어진 것에 대해 사고를 한다. 이것을 오성(understanding, 범주를 통해 사고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그런 데, 이 오성에는 뭔가의 틀이 있다. 그래서 어떤 주어진 직관들을 분류하고 종합해 내어서 개념을 산출해 낸다. 이 기능을 범 주(category)라고 하는데, 그것은 수량, 성질, 관계, 양상의 틀로 구성되어 있다. 이 범주라는 틀 속에 주어진 어떤 표상들이 들어가면 여기에서 개념들이 산출되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개념들을 종합하여 살펴보니, 그것이 곧 자연법칙과 일치하더라는 것이다. 특 히 범주의 기능 중에서 '관계'의 기능 중에 '인과율'이라는 기능이 존재한다. 우리 범주의 기능 속에는 "원인과 결과"를 추정하고 이해 하는 틀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세상의 모든 것이 경험을 통해 주어지고, 그것이 표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것을 범주의 여러 기 능을 통해 분류를 한후, 다시 이것의 관계를 파악하여 인과율로 종합을 하였을 때, 원인과 결과의 법칙으로서의 자연법칙이 여기에서 산출되어 나왔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정신 속에 자리잡은 범주에는 자연법칙이 선재하여 있으며, 결국 우리의 주관(정신적 존재로서의 주체)은 자연 속에 자연법칙을 산출해 내는 법칙제정자이더라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은 이렇게 오성을 통해 주어진 개념들을 변증적으로 추리를 한다. 이 기능을 칸트는 순수이성(좁은 의미의 이성)이라고 부 른다. 그래서 주어진 사물들에 대해서 그 자연법칙을 이해하고, 심지어 자연법칙을 산출해 내는 것이다. 칸트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 의 사유의 기능에서 가장 상위의 위치에 이러한 변증적 추리의 기능이 존재한다. 그래서 끝없이 생각하면서 새로운 법칙과 원리들을 산출해 내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과학의 발견이며, 산업의 발전이었다. 그런데, 이 변증적 기능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역에 대해서는 자꾸 이율배반의 현상을 가져왔다. 우리의 순수이성은 주어진 모든 자료에 대해서 끝없이 변증적 추리를 하는데, 형이상학적 이슈에 대해서는 산출된 개념의 충돌이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명제가 형이상학적 명제들이었다. 특히 자유, 영혼불멸, 신존재 등의 경우였다. 이러한 대상들의 존재는 우리의 언어사용 등을 통해서 나타난다. 그런데, 순수이성으로 접근을 하면, 자꾸 명제들이 충돌을 한다. 실천이성비판 우리 정신의 상위 기능 중에 이성(협의의 이성)이 존재하는데, 칸트는 이 이성을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으로 구분한다. 순수이성은 사유 의 기능을 말한다. 우리는 정신의 기능을 "지식-감정-의지"라고 말하는데, 칸트는 순수이성으로서 지식을 논하였으며, 이제는 그 논의 를 의지 혹은 행위를 규정하는 실천이성으로 전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지식을 기반으로 우리는 어떻게 행위하는가 이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 인생들의 일반적인 행위기준은 인과율에 따른 행위를 한다. 이 인과율이 자연법칙인데, 우리의 순수이성은 이 인 과율을 자동적으로 인식해 낸다. 그리고 거기에 맞추어서 행위를 한다. 인간은 자신의 앞날을 예측을 한다. 그리고 오늘날 준비를 한 다. 우리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이 인과율을 기반으로 하여 자신들의 삶을 설계한다. 이것이 바로 행위의 준칙인 것이다. 칸트는 이러한 인간 행위의 가장 대표적인 것을 준칙(maxim)이라고 부르는데, 개인의 주관적 행위 원리이다. "나는 행복하기 위해서 오늘 열심히 공부한다. 나는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한다. 나는 건강하기 위해서 운동을 한다.…"는 모든 행위원 리들은 "…하면(위해),…한다"의 조건절의 인과율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준칙에 반하는 원리가 등장하는데, "나는 너무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어서, 도둑질을 하였다"의 준칙으로서의 행위명제가 있다고 하자. 이 세상의 모든 범죄는 이러한 형태의 '인과율'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이 인과율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명제가 내 안 에서 양심의 소리가 들려온다. 칸트는 이 도덕명령을 '인과율'에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자유'라고 부른다. 그래서 칸트는 '정언명 령(Categorical Imperative)'의 한 공식으로서, "네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법칙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고 말 한다. 이 양심의 도덕명령을 발하는 기능이 우리의 이성에 존재하는 데, 그것이 곧 실천이성이라는 것이다. 칸트는 이제 이 실천이성의 세계를 추적하여 들어간다. 이 실천이성 이면에 도덕법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 도덕법은 어떤 현상 을 만나면, 그곳에서 곧바로 소리를 발한다. 모든 사건사건 마다에서 도덕법칙의 제정자로서 군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소리는 아무 리 준칙의 이유를 갖다가 대어도 소용이 없다. 이 도덕법은 기독교의 율법의 이야기와 똑 같았다. 그런데, 그 율법은 신의 성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실천이성에 자리잡은 그 도덕법은 하늘의 최고선을 발하는 존재와 맞닿아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로 말하자면, 로고스(말씀 하나님, 하나님의 정신·마음)와 맞닿아 있었던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의 실천이성은 "자유, 영혼불멸, 신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요청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칸트의 신존재증명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칸트는 실천이성의 윤리가 무엇인지를 찾는다. 고대 그리스철학자들은 최고선을 찾았는데, 그 최고선에게서는 '도덕' 의 의무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진정한 '쾌락'이 함께 나왔다는 것이다. 칸트는 신비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곳까지 이르 지는 못하였지만, 그 세계를 소개한다. (필자: 우리는 그러한 세계를 기독교 신비주의에서 볼 수 있다. 기독교는 최고선의 로고스가 성 육신을 하였으며, 우리는 그와 결합하므로 최고의 쾌락을 누림과 동시에 도덕적 성취를 갖게 되는 것이다.) 판단력 비판 우리의 모든 사유와 행위는 "지식-감정-의지"의 산물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지식(오성)을 탐구하였고, 실천이성비판을 통해 서 의지(협의의 이성)를 규명하였다. 이때 우리의 지식은 자연세계를 통해 습득을 하였으며, 의지는 자유의 세계(곧 하늘)와 연결되었 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이 양자는 단절된 것이 아니라, "지-정-의"로 연결되어 있다. 이 양자의 연결점은 무엇일까? 칸트는 그 것을 판단력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판단력의 매개체는 곧 상상력이었다. 칸트에 의하면, 판단력에는 규정적 판단력이 있으며 반성적 판단력이 있다. 규정적 판단력은 특수적으로 경험하는 것들을 보편적으로 밝혀진 것 아래로 모으는 기능을 한다. 그런데, 반성적 판단력은 특수한 것들을 통해서 보편적인 것을 발견하는 판단력이다. 여기에서 이제 새로운 법칙의 발견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순수이성에서 작동하는 판단력이다. 칸트는 우리의 오성 안에 있는 범주의 기 능이 이 판단력에도 동일하게 존재한다. 자연법칙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 곧 '자연의 종별화 법칙'이 우리의 판단력 속에 선험적으로 내재하여 있는데, 그 주요한 특성으로서 '합목적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반성적 판단력이 주는 선별된 재료로 우리 오성은 자연법칙을 산출해 낸다. 자연이 합목적적인데, 이렇게 판단력에 존재하는 그 '합목적성'(어떤 대상이나 현상이 마치 어떤 목적에 맞게 짜여 있는 듯한 성격)으로, 우리가 발견하는 자연법칙도 그러하다. 그런데, 칸트에 의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그 합목적성이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법칙을 이해하고 사물에 적용하 여 또 다른 법칙을 산출해 낸다면, 우리의 주관(정신적 존재로서의 주체)이 그곳에 합목적성을 부여하여 산출한다는 것이다. 칸트의 '미감적 판단'의 주제는 이 '합목적성'이 '주관성'을 논증하는 자리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을 취미판단이라고 하는데, 이 취미판단은 모든 개별적 존재들에게 주관적이다. 그런데, 그 판단은 거의 법칙처 럼 강요된다. 이것은 우리의 판단력의 범주(원리) 속에 있는 그 합목적성이 주관적이라는 의미이다. 이 취미판단은 우리 안에 있는 판 단력의 범주가 "주관적 합목적성"의 원리 하에 작동하고 있음을 반증한 것이다. '미감적 판단'중 '숭고판단'이 존재한다. '거대한 자연 등'을 보면서 불쾌와 쾌의 감정이 산출되는데, 여기에서는 이율배반이 등장한다. 우리의 상상력이 거대한 자연 등을 보면서 당혹감에 빠지며 불쾌를 산출한다. 여기에 이성이 개입하며 절대자를 인식하고 요청하게 된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의 판단력에는 '목적론적 판단'이 존재한다. 자연에는 분명히 '합목적성'이 목격된다. 그런데, 이것을 자연 자체에 내재하는가를 보려고 들어가 보았을 때, 자연 속의 존재들 각각에는 이러한 합목적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자연은 합목적적 으로 운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합목적성을 유지케 하는 어떤 유기적 존재가 있음을 알게 한다. 그러한 존재가 바로 '주관적 합목적 성'을 가지고, 자연을 관리하고 있는 '유기적 존재'로서의 인간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를 보증하는 존재가 바로 신이라는 존재 이다. 그래서 자연의 합목적성을 보면, 이러한 것은 신의 존재의 필연성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칸트의 이성은 정신의 핵심기능일 수 있다. 정신의 존재와 그 활동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내용들이다. 칸트의 세 비판서로 인해 정신의 존재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그의 세 비판서는 논리학의 정수라고 말할 수 있는데, 형이상학적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기반을 놓은 책들이다. 오늘날 철학의 인기가 시들어져있는데, 그럼에도 많은 철학도와 신학도들에게 귀한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025. 10. 4 신학박사 최 환 열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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