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의 가상현실이나 시뮬레이션 우주 같은 소재는 마법과 같은 도구라는 인식이 내게는 있었다. 아주 좋은 의미에서 그렇게 생각했던 건 아니다. 드래곤과 엘프와 도깨비와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세계를 그려놓고 나중에 가서 시뮬레이션이었다고 해버리는 것처럼 뭐든 다 SF로 만들어버리는 도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세계를 그리고 싶은데 현실 세계의 법칙을 멋대로 깨뜨리고 싶지는 않을 때 쓰면 얼마나 편리하겠는가. 물론 끝은 대체로 허망하겠지만(깨어나보니 꿈이었네, 젠장).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시뮬레이션 우주를 사용한 게 바로 그것 때문이라는 점을 고백해야겠다. 이 이야기의 출발점은 “우주와 인류를 시뮬레이션 하는 존재의 목적은 무엇일까?”가 아니었다. 원래의 발상은 “과학이, 좀 더 정확하게는, 실험이나 방법론이나 제도 같은 게 아닌 자연 법칙 그 자체가 정말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면 어떨까?”였다.
처음에는 생물학, 화학 같은 다른 분야도 다루려고 했지만, 어려워서 포기하고 우주론에 집중했다. 그러고도 우주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물질 세계를 떠올리기가 너무 어려워서 고민하다가 시뮬레이션 우주를 가져오고 말았다(거 봐, 역시 편리하다니까).
그리하여 지금과 같은 이야기가 탄생했다. 나로서는 최선이었으니 부디 허망한 이야기로 끝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