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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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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관상비결 유년법>

[POD] 내 안에 그분을 노래하는 걸인

셀 수 없이 오랜 옛적부터 이 몸을 만들어 보고 듣고 느끼고 알게 했으니 물건을 쥘 수 있도록 세밀한 팔과 손가락들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걷고 달리도록 긴 다리와 균형을 잡고 설 수 있는 발가락들 어느 것 하나 불필요한 것 없이 완전한 조화로써 세상에 적응하도록 베풀어 주신 내 안에 그분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노라 설혹 뜻에 맞지 않는 세상을 힘겨워하며 분노와 원망의 거품을 쏟아낸다 해도 그것은 모두 내 안에 그분께서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능력이 자신에게 존재함을 일깨우기 위한 일환이니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게 하는 것으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들리게 하는 것으로 맛보는 것이 아니라 맛을 알게 하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게 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우리 안에 그분을 예경하는 것 우주의 모든 생명체들이여, 그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일지라.

[POD] 범본금강경

금강경은 직역본 금강경과 중국어본 금강경이 있습니다. 직역본은 현장법사가 붓다께서 설하신 금강경을 들려오는데 그대로 적은 것이며, 중국어본 금강경은 구마라집대사가 직역본 금강경을 중국어로 해석하면서 대중들이 알기 쉽게 번역해 놓은 것입니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인도에서 전파된 불교를 받아들이는 초창기였으므로 광대한 불교의 사상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직역본 금강경과 번역된 중국어본 금강경과는 상당히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붓다께서 수보리존자를 통해 존재의 실상을 전하려 한 본말까지도 뒤바뀌어 있다면 이제는 그것을 옳게 바로 잡아야 합니다. 앞서 출간된 직역본 금강경에서는 중국어본과 일일이 비교하면서 어느 부분이 뒤바뀌었는지를 살핌으로써 금강경의 본말을 이해하고자 하였습니다. 범본 금강경에서는 직역본 금강경에서 말씀하신 본말에 대하여 최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원뜻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내도에서 중복된 부분을 삭제하고, 내용을 압축하여 쉽게 이해하고 접할 수 있도록 편집되었음을 밝힙니다. 모쪼록 붓다께서 설하신 이 시대의 최고의 경전이라고 극찬할 수 있는 것은 마음과 성품의 두 가지 측면에서 설해진 경전이기 때문입니다. 컴퓨터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입력된 정보가 아니라 텅 빈 공간인 하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드가 없다면 정보를 입력시킬 수 없듯이 우리도 역시 입력된 정보를 통해 마음을 사용하지만 마음이 마음일 수 있는 것은 마음의 바탕인 성품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컴퓨터에 입력된 정보를 통해 하드의 속성을 밝힐 수 없는 것처럼 인식과 분별의 마음을 통해서는 성품을 밝히기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탓으로 성품이란 우리와 늘 함께 하면서도 마치 한 번도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한 과일처럼 생소하고 낯설 뿐입니다. 붓다는 금강경에서 그것을 언어로써 표현하고 있으므로 있음과 없음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언어적 표현에 생소한 우리들은 금강경이 낯설게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범본 금강경은 불교계에서 최고의 강백이신 범어사 무비큰스님의 인터넷 법당인 염화실에서 연재되었으며, 마음과 성품을 설하고 계신 소중한 경전을 통해 우리 모두 마음 심지에 불붙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삼가 이 경전을 올립니다. - 일러두기

[POD]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

끊임없이 내면을 지켜보는 사람은 삶을 통해 배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내면에는 세상의 온갖 것들이 자리 잡고 있는 까닭이다. 내면으로 들어갈수록 텅 빈 허공과 같아서 내면의 끝은 결코 보이질 않는다. 이처럼 우리들 내면은 허공과도 같은 심원의 바다처럼 존재한다. 그렇기에 삶을 배움의 터전으로 생각한다면 세상은 계속되는 순환의 과정이라는 사실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시작과 끝이 존재하는 직선상으로 놓고 보길 즐겨한다. 어쩌면 그로 인해서 갈등과 혼란이 생겨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곧 타인과의 비교로 자신의 삶에 점수가 매겨지는 것이기에 타인의 관점을 통해 자신을 바라본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그러나 묵묵히 소걸음으로 꾸준히 걷은 사람은 비록 가시적인 성과는 없을지라도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관철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걷고 있는 한 걸음이 곧 목표이기에 매순간이 목적지가 된 까닭이리라.

[POD] 직역본금강경

우리가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는 탓으로 살만하면 죽어야 하고, 쉴만하면 떠나야 하고 정들만하면 이별해야 하는 가슴 아픈 세상살이를 무수히 반복하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입니다. 만일 전생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면 평생을 버둥거리다 매번 죽음 앞에서 좌절해야 하는 무기력한 삶을 마냥 좋다고 즐길 수만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꿈에서 깨어나듯 이제는 붓다께서 설하신 금강경의 근본 취지를 올바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기에 그동안 우리에게 별로 친숙하지 않은 직역 범어본을 중심으로 다루었습니다. 붓다께서 설하신 직역본의 내용과 의역본이 달라진 부분을 살피면서 지혜의 경전인 금강경을 통해 피가 되고 살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절대 관념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시선이 머물지 않도록 직역본과 중국어본과의 대조를 통해서 붓다께서 설하신 금강경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근접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POD] 현대인의 화두참선

들어감에 앞서 정신수련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은 마음의 본성을 밝혀 희로애락에 흔들리는 마음을 벗어나 흔들림 없는 굳건한 반석처럼 살아가는 것이리라. 우리는 탐진치 삼독이라 불리는 욕망과 분노의 불길에 휩싸여 있으므로 마음을 항복받는다는 것의 의미는 삼독의 마음을 물리치고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마음자리가 텅 비어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삼독의 마음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눈으로 사물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들으면서 나타나는 아지랑이처럼 허망한 물건이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깨침이다. 어째서 마음을 다스리고 싶은 욕망이 인간에게 존재하는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상상했던 이미지와 현실이 동떨어진 괴리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떤 환경이나 여건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마음을 유지한다는 것은 정신수련을 통하지 않고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만치 마음은 쉽사리 다룰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정신수련의 길로 들어섰다는 의미는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는 의미도 된다. 내 마음이라면 내가 원하면 움직일 수 있어야 하는데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 까닭이다. 생생하게 물기가 오른 나무는 꺾는 것이 쉽지 않지만 물기 없이 바짝 마른 나무라면 쉽게 꺾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음도 그와 같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바짝 마른 나뭇가지처럼, 싸늘하게 식은 재와 같은 마음을 지녀야 한다. 마음공부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원수처럼 볼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은 늘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고 어딘가로 떠나야 한다고 재촉하는 어린아이처럼 보채기 때문이다. 마음의 말을 들어주다보면 욕망은 한 없이 부풀려지고 분노는 끝없이 번져나간다. 그렇기에 마음이란 망념 그 자체로 인식되어야 한다. 마음을 망념이라고 규정짓는다면 마음이 일으킨 모든 욕구에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심지어는 산만하고 번뇌에 물든 마음을 벗어나 고요한 평화를 원하는 그것까지도 망념이 행하는 일일 뿐이다. 마음공부의 길로 들어서기 전에 무엇보다 먼저 짚고 가야 할 것은 생각과 마음의 관계부터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생각과 마음을 구분지어 본다면 생각은 눈귀코혀 등이 사물이나 소리 음식 등에 대한 경계를 만날 때 일어나는 반응이다. 그러므로 생각이란 단순히 눈에 사물이 비치고, 귀에 소리가 들려오기에 내 의지로써 보이고 들려오는 것이 아니므로 어떠한 의도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러나 마음은 생각에 대하여 의지나 욕구를 동반하면서 일으킨 것이다. 생각에 대하여 의도를 지닌 마음은 과거의 기억과 이미지를 비교하면서 좋은 것은 애착하고 싫은 것은 원망의 거품을 일으킨다. 만일 우리가 마음을 내 마음으로 믿고 사는 것은 어떠한 의도도 없이 거울에 비친 영상처럼 생겨난 생각을 틀 잡고 싶어하는 허망함을 떠받들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마음을 내 마음으로만 여기는 것은 허공 꽃 밑에 앉아 허공 꽃이 열매 맺기를 기다리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수행에 있어서는 마음을 망념이라 규정짓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마음과 무작정 다투려는 사람은 벗어난 과녁에 활시위를 당기는 것이다. 가령 밝은 방에 커튼을 내리면 즉시에 어둠이 나타나고 해를 가리웠던 커튼을 젖히면 그 즉시 밝아진다. 어둠을 몰아내고 밝음을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슬픔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기쁨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밝음과 어둠이 두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듯이 실상은행복과 불행도 제각각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같은 얼굴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한 마음으로 기쁨을 맛보고 슬픔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어둠과 밝음, 행복과 불행의 두 모습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허공처럼 우리들 마음의 본성도 그와 같다. 어디에도 물들지 않는 허공과 같은 본성의 마음자리를 지녔음에도 그것을 알지 못하기에 행복과 즐거움에 매달리지만 여전히 지나쳐 갈 뿐이다. 이것을 고쳐 저것을 구하려 하는 것은 여전히 세상을 이분적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다. 번뇌가 즉시에 열반이고 중생이 즉시에 부처이고 어리석음이 즉시에 깨달음이라는 사실에 눈떠야 한다. 만일 번뇌를 주물러 열반을 만들려 하고 어리석음을 벗어나 깨달음을 구하려 한다면 마음은 여전히 산만한 것이며 화두를 참구한다는 것은 산만한 마음부터 잠재우기 위한 것이다. 맑고 흐린 물이 제각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흐린 물속에 맑은 물이 존재하듯, 붕붕 떠다니는 마음속에는 이미 고요한 평화를 지닌 마음이 존재하고 있다.

[POD] 황금불사조 바가바드기타

전쟁을 치르게 된 배경 '바가바드기타'는 인도에서 일어난 쿠루 족에 의한 쿠루크셰트라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왕의 마부인 산자야는 비야사신의 은총에 힘입어, 멀리서도 듣고 보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로 인해 눈 먼 왕인 드리타라슈트라에게 아르쥬나와 그의 스승인 크리슈나와의 대화를 들려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쿠루족의 드리타라슈트라 왕에게는 동생이 있었다. 쿠루족의 두 형제 가문인 카우바라 형제들과 판다바 형제들이다. 전쟁이 일어난 것은 인도의 율법상 장님은 왕이 될 수 없다는 법에 따라 드리타라슈트라 왕의 동생이 왕이 되어야 했지만 동생은 왕이 되는 것을 사양하였다. 드리타라슈트라 대왕의 맏아들인 두료다나가 때가 되면 판다바 형제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영토를 돌려줄 것을 약속하고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고 얼마 후 판다바 형제들이 두료다나 왕에게 왕위와 영토를 돌려달라고 요구했으나 두료다나 왕은 그것을 거절했다. 그러자 쿠루족의 두 형제 가문이 쿠루크셰트라 들판 양 편에 군대를 대치시키고 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살육전을 벌이려는 극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 때 판다바 가문의 다섯 형제 중 셋째인 아루쥬나는 확실한 대의명분을 가지고 싸움터에 나왔으나, 상대편 진영에는 같은 혈족인 자기 사촌들과 할아버지가 있는 것을 보고는 낙담에 빠진다. 그는 자기 혈족을 죽이고 왕좌를 차지하느니 차라리 깊은 숲에 은거하며 명상에 몰두하는 고행자의 삶을 택하려 한다. 그때 스승인 크리슈나는 아르쥬나에게 싸우라고 명한다. 아르쥬나의 왜 싸워야 하는가 라는 의문과 크리슈나의 싸워야 한다는 답변이 '바가바드기타'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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