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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연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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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빛의 조각들>

각의 도시

몇 년 전, 서울 공예박물관을 거닐다가 문득 유목민으로 살아가는 어느 뿔 공예가의 얼굴을 어렴풋이 그려보았다. 그보다 훨씬 오래전, 테이트 브리튼에서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를 보았을 때 마음속에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이 소녀가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을 방법은 없었을까. 서로 다른 장소에서 먼 시차를 두고 태어난 그 두 가지 생각이, 어느 날 한자리에 모여 나란히 걷기 시작한 이야기가 『각의 도시』다. 뒤를 돌아보니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멀고 낯선 장소까지 와버리고 말았지만, 도착한 곳에 어느덧 정이 퍽 들어버린 모양이다. 요 몇 년 매일 함께 뒹굴던 인물들을 배웅하는 지금, 아쉬운 마음이 좀처럼 꺼지지 않으니 말이다. 알아차린 분도 계시겠으나 여러 이름을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빚졌다. 도시의 이름인 ‘라뎀’은 ‘Lathem’을 소리 내 읽은 것으로 ‘Hamlet’의 철자 순서를 바꾼 애너그램이다. ‘포르틴’은 노르웨이 왕자의 이름, 서점 ‘엘시노어’는 성城의 이름에서, 흑각 ‘트랩’은 희곡의 3막 2장에서 극 중 햄릿이 ‘쥐덫the mousetrap’이라고 언급하는 데서 인용했다. 일부 등장인물의 이름에도 희곡 인물의 흔적을 조금씩 녹여두었으니 자유로이 발견해주시기를 바란다. 주권과 정체성을 빼앗긴 도시에서 방향을 찾고자 헤매고 고민하는 소년은 여기에도 있지만, 그 행보가 ‘부재함’보다는 ‘존재함’으로 ‘사라짐’보다는 ‘드러남’ 쪽으로 향하기를 바라며 쓴 글이다. 현재 우리의 모습을 조금씩 거울에 비춰보기도 하면서. 하지만 햄릿이라는 이름이 그저 낯설게 들린다 해도, 이 소설의 동행이 되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소중한 손길을 더해주신 분들이 많다. 긴 여정의 다정하고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주신 윤소진 편집자님과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 팀, 초고를 작업하는 동안 꼭 필요한 조언과 응원을 보내주신 이선 작가님, 긴 작업 중에도 묵묵히 시간을 양보하고 나누어준 가족들과 첫번째 독자 다니엘에게 큰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 페이지를 읽고 계신 당신께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덕분에 또 써나갈 용기를 얻는다. 2025년 가을

메르헨

맨 처음 이 이야기는, 공주 이야기를 재해석하는 단편 청탁으로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다시 쓰기 하려다 시작되었다. 이런 변주를 생각했다. 주인공인 공주는 한 사람이 아닌 쌍둥이인데 만일 그 중에 한 사람이 잠들었다면? 그 공주를 잠에 빠지게 한 것이 마녀의 물레가 아니라 타자기였다면? 잠들지 않은 공주가 위기에 처해 잠든 쌍둥이 공주를 어떻게든 깨워야만 했다면? 하지만 하나둘 뼈대를 세워가는 과정에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색깔은 조금씩 희미해졌고, 결정적으로 단편으로는 맺을 수 없는 분량으로 점점 가지를 뻗어나갔다. 결국 한편의 독자적인 이야기가 될 운명이었던 것 같다. 책에 관한 책, 특히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서사시, 구전 설화, 오페라, 연극, 소설, 만화, 영화 등 우리가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창문의 형태는 때마다 변하더라도 이야기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까지 포함해서. 물성을 가진 책만 생각해도, 한때 전리품으로 약탈하거나 당하기도 하고, 불온한 것으로 여겨져 태워지거나 금지당하는 등의 위기는 늘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물론 책을 벗어나 다른 장르로도 부지런히 재구성된다. 이야기가 선사하는 감격은 어떤 자원으로도 대체 불가능해서가 아닐까. 당장 일이십 년 후 지구의 안위가 염려되는 이 시점에, 먼 미래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소설을 둘러싼 이야기라니 사실 지나친 낭만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쓰는 행위를 통해 상상하지 않는다면, 그 낙관을 어디에서 발견해야 좋을지 막막했음을 고백해본다. 사실 챗GPT에게도 물어보았다. 우리가 인간을 복제하는 그런 시대에 살아도 소설이란 걸 읽고 있을까? 인공지능의 대답과는 별개로, 나는 이야기의 끈질긴 생명력을 감히 바라고 싶었다.

부적격자의 차트

형태도 무게도 없는 기억의 힘은 참 대단하다. 어떤 기억은 발목을 잡기도 하지만 어떤 기억은 등을 밀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어디론가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게 지탱하는 뿌리가 되어주기도 하니까. 기억하고 기억되기, 그것을 씨앗 삼아 너의 처지를 기꺼이 상상하는 용기. 그러한 힘들이 이 무심한 세상을 완전히 박살 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거라고, 우리의 삶을 간신히 이어지게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기억에 관한 글을 자주 쓰게 된다.

빛의 조각들

전체가 아닌 파편은 작거나 불완전하고 때로는 거칠고 날카로울 수 있어도, 자세히 관찰하면 고유의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고 한데 모았을 때는 이전에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를 이루기도 하죠. 조각이 가진 힘은 '여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른 조각과 연결되거나 기꺼이 어느 세계의 일부가 될 수 있는 여지 말이에요. 이 소설도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이들의 자유에 관한 이야기가 되었으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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