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환경에 놓인 아이의 생존 플레이리스트는 의외로 신명 난다. 지금이야 생존보다는 회피성 음악 감상이 주여서 아무 장르나 가리지 않고 듣는다지만, 그 당시 내 생존에 도움을 줬던 음악 장르는 ‘록’, 그중에서도 ‘브릿록’이었다. 드럼과 베이스, 기타와 보컬. 이 네 가지 소리의 조화가 엄청나게 시끄럽기도 하고 또 믿을 수 없게 아
름답기도 해서 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안정제 그 자체였다. 블러, 스웨이드, 오아시스, 펄프……. 이 밖에도 바다 건너 영국의 수많은 밴드들에게 심심한 감사 인사
를 전한다. 당신들 노래가 극동의 한 소녀를 구했다.
말하자면 나는 실제 살아 움직이는 인간들의 사랑을 보고 느끼는 바가 없을 뿐……. 종이 속에 갇혀 있는 인간들의 사랑 이야기라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좋아하는 셈이다. 내 머릿속에서만 구현 가능한 ‘로맨스’에는 심장이 반응했다.
이 완벽한 무정형의 상태. 심리적으로 동떨어진 거리감. 앞서와 같은 조건들이 충족되고 난 뒤에야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온전한 이야기의 형태로 즐길 수 있었다. 로맨스라는 비일상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