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참담하고 낙담한, 수척하고 메마른 어떤 것들을 쓰게 될까? 모르는 일이다. 지금의 마음으로는 아직은 좀 더 해맑고 힘을 내는 소설을 쓰고 싶긴 하지만. 내 마음이 언제 어느 쪽으로 달려가 어떤 소설을 쓰게 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떤 마음으로 쓰든 소설을 쓰게 되는 순간은 좋은 순간임에 틀림없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이야기들을 다시금 찬찬히 살펴보니······ 사는 내내 시시콜콜하게 괴로워하면서도 결국에는 사는 거 좋지 않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가 왜 그럴까? 쾌도 불쾌도 시원스럽게 느끼지 않는 것 같은데 뭐가 그렇게 또 사는 건 좋을까, 스스로에게 그런 걸 되묻게 됩니다. 하지만 단번에 답이 나올 리는 없고······ 일곱 편 묶였으니 한 일곱 편 더 묶으면 조금은 대답에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만 해봅니다. 대부분 어딘가를 누군가를 떠나온 인물들이 모인 터라 저도 아직 소설의 인물들에게 다가가기가 좀 어렵습니다. 익숙했던 자리를 이제 막 떠나왔으니 마음이 싱숭생숭할 것 같고 그런 사람들에게 괜히 말 걸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처럼 저 자신이기도 하겠죠.
그러니까 앞선 말은 제가 저에게 말 거는 일도 쉽지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상하게 가면 갈수록 스스로가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낯설고 데면데면합니다. 이전에 알고 있던 나와 또 조금 다른 표정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아서 내가 알던 걘 누구였지? 다 내 착각이었나?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는데 두번째 소설집에 실린 소설을 마주할 때에도 역시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혹은 이번 소설집에 실릴 이야기들을 마주해야 하는 현실의 제가 하필 그런 시기를 지나고 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전까지의 나를 파악하는 데에도 그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달라진 나를 이제 또 알아보려면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이 걸릴까······ 막막하고 허무해서 소설집을 묶는 동안 선배 소설가를 만나 투덜거린 적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하는 거 너무 허무하고 지겨워요, 기껏 알게 되면 뭐 해요 시기나 상황에 따라 금세 변해버리는데······ 하고요. 내가 누구인지 정리를 좀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살면서 ‘나 같은 것’의 예시나 근거를 열심히 수집하고 탐색해서 이런저런 정의 내림으로 모종의 정리를 해놓으면 어느 날 문득 상황이 바뀌고 자리가 달라지고 그러면 나름대로 정리되었다고 믿은 나의 내면 어딘가에서 어느새 삐죽 튀어나와 있는, 예외의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그럴 때면 왜 그렇게 열이 받는지. 아마 그 푸념도 열받아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것이었을 겁니다. 아 계속 달라질 거면 왜 알아봐야 돼요? 같은 억지를 전부 들어준 큰 그릇의 선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판본이 여러 개인 거죠.”
그 말을 오래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만 알고 있었으면 억울해할 일도 아니었는데 하는 부끄러움이 함께라 더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요. 제가 오래 기억하는 일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수치심과 끈적하게 얽혀 있는데요. 선배로부터 그 말을 들은 그 장면은 기분 좋은 부끄러움 쪽이라 더 희소합니다. 그런 적은 살면서 거의 없었던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스스로에 대한 정보를 업데이트할 때마다 이전의 것들이 무의미해진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더는 그런 말을 할 수 없어진 나, 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나, 현재와는 동떨어진 나. 그런데 우습죠? 첫번째 소설집의 ‘작가의 말’에서 저는 분명히 이게 이때의 나고 시간이 흘러 이 마음을 취소하게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적어놓은 것 같은데요.
말하자면 꼴값이었던 걸까요······ 실제로 그렇게 한다는 게 어떤 뜻인지 모르는데 멋진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그때는 알았는데 이후에 살면서 그런 마음을 싹 까먹게 된 건지. 둘 중 어느 것인지 몰라도 이렇게 다시 배운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까먹으면 어때? 다시 배운다! 그렇게 저를 한번 봐주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우왕좌왕 저를 기록하는 것은, 두 번은 까먹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자꾸만 달라지는 내가 원망스럽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잘해보자, 사실 스스로를 알아보는 거 (끔찍하지만) 재밌잖아, 하고 인정하려고요. 저는 저밖에 모르고, 혼자 있으면 영원히 그것밖에 모를 것 같고, 그런 제가 끔찍해서 외부의 누군가가 저를 좀 흔들고 밀어 그 자리에서 벗어나게 해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