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우리 삶의 여러 가지 주제를 통해 인간 존재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여정입니다. 수 세기 동안 문학과 철학, 그리고 음악 속에서 인류는 사랑, 꿈, 성장, 자연, 도전, 그리고 행복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다뤄왔습니다. 이러한 주제들은 세대를 넘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울리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경험과 감정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힘든 순간이 찾아오고, 때로는 기쁨이 넘치는 날이 오기도 합니다. 이 책은 그러한 삶의 기복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를 발견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성장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나갈 수 있는지를 탐구합니다.
각 장은 명언과 문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우리에게 깊은 사유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 명언들은 과거의 지혜자들이 남긴 메시지로, 각기 다른 배경과 시대 속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는 명언을 필사하며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이를 통해 스스로의 삶에 의미를 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인생은 매 순간이 소중하며, 우리는 그 순간들을 통해 더 나은 존재로 성장해 나갑니다. 이 책이 여러분의 삶에 작은 빛이 되고, 더 깊은 이해와 인식을 가져다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함께 나누는 이 길이 여러분 각자의 여정에서 소중한 순간이 되길 바랍니다.
이제 여러분과 함께 이 글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와 감정들을 필사하며,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길 바랍니다. - 머리말
역사를 바꾼 야망과 나폴레옹의 유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 이름은 한때 전 세계를 흔들었던 전쟁의 영웅이자 정치적 혁신의 상징으로 기억됩니다.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등장한 그는 강력한 군사적, 정치적 리더십으로 유럽 대륙을 재편하며, 근대 사회로의 전환을 이끈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이 책은 그가 남긴 유산과 전쟁, 정치,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난 야망과 좌절의 복잡한 이야기들을 탐구하며,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이 단순한 정복자가 아닌 역사의 중요한 주체였음을 조명합니다.
나폴레옹의 시대는 프랑스 대혁명의 이상, 즉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전 유럽에 퍼뜨리려는 정치적 야망과 맞물려 있었습니다. 그는 군사적 승리를 통해 유럽 대륙을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정치적 질서를 구축하고 국가 체제를 개혁하는 데에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의 업적은 단순한 전쟁의 승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기반으로 유럽 각국에 자유와 평등을 도입하려는 시도로 이어졌습니다. 나폴레옹의 제국은 그러한 혁신과 변화를 촉진하는 기회였으며, 그의 이름은 혁신적인 개혁가로서의 측면에서도 강렬하게 기억됩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인생은 단지 영광과 승리로만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워털루에서의 최후 패배와 함께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결국 세인트헬레나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몰락은 한편으로는 그의 끝없는 야망과 과도한 전략적 모험이 가져온 불가피한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실패는 그가 세운 제국의 한계이자, 역사 속에서 인간의 야망과 권력에 대한 교훈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책은 나폴레옹의 성공과 실패, 그가 유럽 대륙에 남긴 정치적, 군사적 유산을 포괄적으로 조망합니다. 그의 군사적 천재성과 정치적 기교는 그를 찬양하는 많은 이들에게 경외의 대상이 되지만, 동시에 그의 실책과 오만은 많은 비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그의 러시아 원정의 실패와 대륙봉쇄령은 그의 몰락을 가속화한 결정적인 요인으로 평가되며, 오늘날까지도 그의 리더십과 결정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단지 과거의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오늘날의 현대 사회와 국가 체제, 법률 시스템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나폴레옹 법전은 현대 민법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그의 전쟁과 정치적 결단은 단순히 군사적 성과를 넘어, 근대 국가의 형성과 새로운 정치적 질서의 탄생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전쟁과 정치의 교차점에서 인간의 본성과 야망, 그리고 역사의 흐름을 만들어낸 인물이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나폴레옹의 복잡한 인물상과 그가 이끈 전쟁, 그리고 그로 인해 변화한 유럽의 역사를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단순한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근대 정치의 한 축을 형성한 인물로, 그의 야망은 그저 개인의 영광에 그치지 않고, 유럽의 새로운 정치적 질서를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이야기 속에는 권력, 혁신, 야망이 얽힌 장대한 서사가 담겨 있으며, 우리는 그를 통해 오늘날의 세계를 보다 명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시대는 분명히 끝났지만, 그의 유산은 지금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그의 성공과 실패는 단순한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정치적, 사회적 도전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나폴레옹의 삶과 그의 시대를 통해, 독자들이 오늘날의 문제를 다시 한번 성찰하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안내서가 될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남긴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의 혁신적 사고와 강력한 지도력, 그리고 그를 둘러싼 전쟁과 정치의 소용돌이는 여전히 현대 사회와 국가의 기초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나폴레옹의 시대 속에서 오늘날의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보다 깊이 탐구하게 될 것입니다. - 머리말
“빌 클린턴과 오바마 대통령의 롤 모델이 된 케네디”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인 존 F. 케네디 는 정치적인 후대들에게 정신적인 지주였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전 대통령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입니다. 1963년 7월 케네디가 암살당하기 5개월 전 클린턴은 고등학교를 다니던 16살 때 각 지역 우수 고등학생 그룹으로 선발돼 백악관에서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단 몇 초간의 짧은 대면이었지만 클린턴은 그 만남으로 자신도 정치인이 되겠다는 희망을 굳혔고 결국 30년 후 대통령이 됐습니다. 솔직함과 진정성으로 대중을 사로잡으며 미국인들이 가장 갈구하던 화두 ‘변화’를 내세워 흑색 돌풍을 일으킨 오바마 대통령을 미국인들은 ‘검은 케네디’라고 부릅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은 1962년 충북 충주고 3학년 때 국제적십자사 비스타(VISTA) 프로그램의 한국 대표 4명 중 1명으로 선발돼 미국 워싱턴에서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반 총장은 1962년 8월 42개국에서 선발된 학생 102명과 함께 미국에 도착해 10명씩 조를 짜 미국적십자사 지부를 방문했습니다. 반 총장이 속한 조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홈스테이를 하며, 일주일을 보낸 뒤 오리건주의 포틀랜드와 워싱턴주의 스포캔도 방문했습니다. 반 총장은 “관광도 하고 소풍도 가면서 미국의 풍물을 배우는 과정이었다.”면서 “특히 자동차를 탄 채 영화 구경을 하는 드라이브 인 극장이 인상 깊었다.”고 당시를 회고했습니다.
반 총장은 백악관 방문 당시 케네디 대통령을 면담한 것이 평생 공직에 몸담을 결심을 하게 한 계기가 됐다고 강조했습니다.
백악관에서 학생들은 차례로 케네디 대통령과 악수하고 단체 사진을 찍었으며 수줍음이 많았던 반 총장은 적극적인 여학생들에게 앞자리를 내주고 뒷줄에서 미소를 지으며 케네디 대통령을 바라보는 모습이 당시 사진에 남아 있습니다.
어린 시절 ‘영어 신동’으로 불렸고 충주고 재학시절 미국 정부가 주최하는 영어 말하기 대회에 입상해 백악관에 초청, 당시 케네디 대통령과 만나면서 외교관의 꿈을 키웠다고 합니다.
암살당했지만 케네디 대통령이 미국 국민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것은 국민에게 용기와 자신감 넘치는 리더십, 꿈과 희망을 선사했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으로 다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미국은 1960년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공화당의 닉슨 후보에 맞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등장한 인물이 바로 존 F. 케네디였습니다.
처음에 프린스턴에서 공부를 시작했으나 병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1936년에 다시 하버드 대학 정치학과에 들어갔습니다. 대학 시절 동안에 영국을 자주 여행했는데, 당시 아버지가 영국 주재 대사로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얼마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 해군에 입대합니다. 1945년에 해군 복무를 마친 케네디는 통신기자가 되어 샌프란시스코의 유엔 창립 회의와 포츠담 회담을 취재합니다. 1946년에 그는 29세밖에 안 되었지만 그의 외할아버지 존 F. 피츠제럴드가 전에 차지했던 매사추세츠 제11선거구에서 민주당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두 번이나 재선되었습니다.
1953년에 케네디는 재클린 리 부비에와 결혼을 합니다. 그녀는 로드 아일랜드에서 사회적 명성을 날리고 있던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학창 시절에 축구를 하다가 다친 끈질긴 척추통을 치료하기 위하여 그는 1954년에 수술을 받았는데, 병원에서 『용기 있는 사람들』이라는 책을 썼어요. 이 책은 미국 의회에서 역사상 뛰어난 일을 한 의원들의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1957년 전기 부분에서 퓰리처상을 받았습니다.
1956년에는 39세의 젊은 나이로 시카고의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애들라이 스티븐슨의 지명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 후 부통령 후보에 오르내렸으나 그 당시에는 후보로 지명되지는 못했어요. 이때부터 1960년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기 위하여 착실히 준비했고, 마침내 1960년 7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1차 투표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습니다.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는 1960년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케네디는 대통령직에 1961년 1월 20일부터 1963년 11월 22일까지 있었고, 임기 동안에 피그스만 침공, 쿠바 미사일 위기, 베를린 장벽, 우주 경쟁, 베트남 전쟁 간접 개입, 흑인 민권 운동 등 많은 일이 일어났어요.
케네디는 미국 대통령 중에서 유일한 로마 가톨릭 신자라는 점과, 상류사회에서 잉글랜드계 혈통에 밀리던 아일랜드계 혈통 때문에 기독교 근본주의를 내세운 미국 공화당 세력이나 영국 보수당 세력에 심한 반발과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반유대주의 반영 제국주의를 내세우며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아일랜드의 공화주의 반영국 제국주의 무장단체인 아일랜드의 IRA를 강력하게 지지하면서 이스라엘 우익 단체에 대한 상당한 불편한 감정을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아름답고 우아한 아내 재클린 부비어와 함께 케네디는 1960년대 새로운 자유의 상징으로 미 국민에게 변화를 보여주며 격변을 일으켰습니다.
케네디는 “제가 가진 모든 생각과 정신을 전 세계의 자유라는 대의에 헌신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제 가장 훌륭한 자랑거리는 이겁니다.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
케네디는 CIA와 분노한 쿠바 망명자가 일으킨 카스트로 독재 정부와의 비밀 전쟁을 이어받습니다. 카스트로는 성공한 혁명가로 미국 산업 이익에 위협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1961년 4월 피그스만 침공이 참패로 돌아가며 막 내리고 케네디는 쿠바 망명자 단체의 공군 전력 투입을 거부하며, 사회적 책임을 떠 안자 CIA가 사사로이 자신을 속이고 쿠바의 미국 침공을 종용했다고 주장합니다.
1962년 10월, 전 세계가 핵전쟁 전에 이르자 케네디는 격리 조치를 취합니다. 미국 해안에서 145㎞ 떨어진 곳에 소련의 핵미사일 존재 여부를 발표한 직후였습니다. 더 많은 미사일을 실은 소련 함선이 쿠바로 향했지만, 마지막 순간 함선을 되돌린다. 전 세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케네디가 소련 총리와 거래했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러시아가 미사일을 거두는 대신 쿠바를 침공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케네디가 공산주의를 무르게 대응한다는 의혹도 퍼졌습니다.
케네디는 라오스와 베트남 전쟁에도 휘말립니다. “베트남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정부가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게 더 노력하지 않으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이건 그들의 전쟁입니다. 승패도 그들에게 달렸죠.”
그해 운명적인 초여름 케네디는 아메리칸대학에서 자신의 새 비전을 제시합니다. “어떤 평화를 의도하고 어떤 평화를 추구합니까? 전쟁 무기에 따른 미국의 지배에 의한 평화는 아닙니다. 소련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도 재검토해야 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연결 고리는 우리 모두 이 작은 행성에 살고 있고 같은 공기를 마시며 아이들의 미래를 소중히 여긴다는 겁니다. 우리 모두 다 같은 인간이죠. ”
텍사스 댈러스에서 케네디 대통령 자동차 행렬에 세 발의 총격이 가해졌다. 첫 소식에 따르면 대통령께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며, 총알 세 발이 발견됐고 코널리 주지사도 맞았습니다. 대통령께선 6.5㎞ 떨어진 병원에 급히 이송됐으며 총알이 목 아래를 관통해 머리 뒤로 나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확인된 바는 없고 수혈이 이뤄지고 병자 성사가 진행됩니다.
댈러스에서 공식 발표가 있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께서 서거했다고 ….
46세에 죽었지만, 천년을 사는 남자, 존 F. 케네디였습니다.
부통령 존슨이 병원을 나섰다. 곧 취임 선서를 하고 미국 36대 대통령이 됩니다.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님께 감사드립니다. - 머리말
중국인들이 선정한 ‘가장 위대한 중국인’ 중 공자에 이어 2위가 시황제입니다.
시황제 영정은 전국 시대 진나라의 제31대 왕으로, 춘추 전국 시대를 끝내고 중국 역사상 최초로 대륙을 통일한 인물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최초의 황제’라는 의미로 ‘시황제’라고 부르게 했습니다. 군현제 실시와 문자 · 화폐 · 도량형 통일 등 중국의 중앙 집권 체제의 기반을 마련하는 치적을 세웠으나 만리장성이나 아방궁 축조 등 대규모의 토목 공사와 분서갱유 사건 등 엄청난 폭정을 행사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영정은 전국 시대 진나라 장양왕의 아들로 기원전 246년 열세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한 그를 대신하여 어머니 조희와 승상 여불위가 섭정을 맡지요.사기에 따르면 영정의 어머니인 조희는 장양왕이 태자가 되기 전 조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할 때 여불위가 바친 기녀라고 합니다. 조희가 그 당시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는 설이 있어 항간에서는 그가 여불위의 아들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영정은 어린 시절을 조나라에서 보냈고, 기원전 250년 아버지 장양왕이 진나라로 돌아와 태자에 책봉되면서 그 후계가 되었습니다.
장양왕이 죽고 즉위한 영정은 여불위를 상국에 임명하고 정치적 전권을 넘겼습니다. 이때 여불위는 훗날 영정의 오른팔이 되어 활약할 이사를 천거했습니다. 기원전 237년 영정은 드디어 친정을 선포합니다. 1년 전 영정의 어머니와 정을 통하던 환관 노애가 반란을 일으킵니다. 영정은 노애를 극형에 처하고 그의 가문을 멸했으며, 노애와 정을 통한 어머니를 감금시키고, 어머니와 노애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을 죽입니다. 이 사건을 빌미로 당시 최대 권력자였던 승상 여불위를 해임하고 드디어 기원전 237년 친정에 임하게 됩니다.
친정을 시작한 영정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바로 이사였습니다. 그는 전국 시대의 7웅 중 하나였던 진나라가 천하 통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고, 통일 이후에는 대륙을 통치할 많은 정책을 세운 장본인입니다. 순자의 문하였던 이사는 강력한 법가 사상가로, 철저한 법치만이 백성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영정 자신도 이사의 영향으로 법가 사상을 중시했고, 군주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강력한 군주제를 수립합니다.
영정은 기원전 230년부터 주변국을 정복하기 시작하여 한 ‧ 조 ‧ 위 ‧ 초 ‧ 연을 차례로 정복합니다.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제나라를 정복함으로써 중국을 하나의 국가로 통일했습니다. 그는 전설의 삼황오제(중국 역사를 시작한 전설상의 황제들)를 능가한다는 의미로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으며, 자신을 시작으로 후손들이 제국을 이어나가기를 바라며 스스로를 시황제라고 칭했습니다.
통일 이후 시황제는 황제로서의 권력을 확립하기 위해 중앙집권 체제를 세우는 데 착수했습니다. 먼저 군웅들이 난립해 있던 전국 시대의 혼란은 지방 귀족들의 통치를 인정한 분봉제 때문이라고 여기고 중앙이 지방을 통치하는 군현제를 실시했습니다. 이사는 진나라의 영토를 전국 36개 군과 현으로 재편하고, 중앙에서 임명한 관리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습니다. 이로써 진나라만의 중앙집권 체제가 정비되었고, 이 체제는 이후 중국의 중앙집권 체제의 기본 골격이 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시황제는 영토 확장도 계속하여 흉노를 물리치고 베트남, 해남도까지 군현을 설치했습니다.
또한 시황제는 전국의 문자와 화폐 ‧ 도량형을 통일하고, 전국에 도로와 운하를 건설했습니다. 먼저 승상 이사로 하여금 소전 문자를 만들게 하여 모든 공문서와 법령에 쓰이는 문자를 통일했습니다. 또한 황금을 상폐, 동전을 하폐로 하여 화폐를 통일시켰습니다. 도량형의 명칭도 통일했는데, 길이는 촌 · 척 · 장, 양은 승 · 두 · 통, 무게는 양 · 근 · 석으로 통일했습니다. 모두 효율적인 중앙집권 체제를 달성하는 정책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시황제는 업적만큼 폭정도 휘둘렀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분서갱유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시황제와 유학자들 사이의 마찰이 극대화되면서 벌어졌고 시황제는 최측근 이사와 함께 법가 사상에 기반을 둔 정책을 시행했는데, 유학자들은 이를 끊임없이 반대했습니다. 특히 제나라 출신의 박사 순우월淳于越이 옛 봉건제를 부활시킬 것을 주청하는 데까지 이르자, 기원전 213년 승상 이사는 유생들이 위험한 사상을 펼치는 것을 막기 위해 진나라 내의 모든 책을 태워 버려야 한다는 상소를 올립니다. 이에 시황제는 의학 ‧ 점술 ‧ 농경 분야를 제외한 모든 책을 불태우게 하고, 유교를 공부하거나 자신의 정책을 반대하면 극형에 처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분서 사건입니다.
갱유 사건은 기원전 212년에 벌어진 것으로 불로장생 약에 대한 시황제의 염원이 발단이었습니다. 신선 사상에 심취한 시황제가 불로장생을 꿈꾸며 방사(도인)로 하여금 불로초를 구해 오게 했는데, 방사는 불로초를 구해 오는 대신 도망을 갑니다. 이에 시황제는 자신을 속인 방사와 여러 분야의 학자 460여 명을 잡아 땅에 파묻습니다. 이 두 사건을 합쳐 ‘분서갱유’라고 하지요.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폭정으로 보기보다는 시황제가 난립해 있던 사상을 통일하여 보다 효율적으로 대륙을 통치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황제의 정책 중 백성들의 원성을 산 것은 단연 무리한 토목 공사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만리장성이죠. 이 만리장성을 축조하는 데는 150만 명의 백성들이 동원되었으며, 4년 만에 30만 명이 사망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그는 아방궁을 건설하기 위해 70만 명의 백성들을 동원했고, 후에 자신이 묻힐 능묘인 여산릉을 조성하는 데도 무리하게 백성들을 동원합니다. 이러한 대규모 토목 공사가 이어지자 나라의 재정이 바닥났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면서 민심이 흉흉해졌습니다.
암살 기도가 이어지면서 시황제는 더더욱 주위를 불신하고 고립되어 갑니다. 그러면서 시황제는 점차 죽음을 두려워하며 불로장생을 꿈꾸게 됩니다. 시황제는 불로초를 찾기 위해 수많은 방사들을 백방으로 보냈는데, 특히 방사 서복이 왜국에 불로초가 있다고 한 말을 믿고 많은 돈을 주고 불로초를 찾으러 보냅니다. 그러나 서복은 동남동녀 3천 명을 이끌고 왜국으로 향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죠. 이는 서복의 거짓말이었지만 시황제는 죽는 날까지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기원전 210년 순행 도중 병을 얻은 시황제는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사기에는 그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황제의 마지막 순행길에 유성이 떨어졌다. 그 운석에는 ‘시황제사이지분始皇帝死而地分’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시황제가 죽고 천하가 갈라진다’라는 의미로, 시황제는 이에 충격을 받고 쓰러진 후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했다.” 라고 합니다. 시황제는 태자 부소를 후계자로 지목했으나 이사와 환관 조고 등의 음모로 부소가 자결하고 황자 호해가 이세황제로 즉위합니다. 이세황제가 즉위한 후 진나라는 진승과 오광의 난, 유방과 항우의 반란 등 숱한 내란에 시달렸고 호해는 결국 4년 만인 기원전 207년에 조고에 의해 강제로 자결했으며 이후 유방이 수도 함양에 입성하면서 진나라는 멸망합니다.
시황제는 사후 자신이 조성한 여산릉에 묻혔습니다. 1974년 서안의 한 시골 마을에서 우물 공사를 하던 중에 땅속에서 도기인형 조각과 쇳조각이 발견되면서 발굴이 시작되었고 전체 규모가 약 2만 5천 제곱미터에 달하는 4개의 갱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갱에는 많은 사람들이 순장되었다고 하며, 실물 크기의 흙 인형인 토용도 6천구 이상 발굴되어 당대의 군사 양식을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시황제는 거대한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으며, 여러 가지 엄청난 치적을 쌓았습니다. 여러 악정에도 그는 오늘날까지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꼽히며, 그의 강력한 왕권에 대해서는 중국의 이후 왕조들과 주변 국가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본서는 청소년 여러분의 어휘력과 문해력 향상을 위해 출간되었습니다. 수 세기 동안 문학과 철학, 그리고 음악 속에서 인류는 사랑, 꿈, 성장, 자연, 도전, 그리고 행복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다뤄왔습니다. 이러한 주제들은 세대를 넘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울리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경험과 감정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힘든 순간이 찾아오고, 때로는 기쁨이 넘치는 날이 오기도 합니다. 이 책은 그러한 삶의 기복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를 발견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성장하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나갈 수 있는지를 탐구합니다.
영화 ‧ 음악‧ 지식‧ 연설‧ 소설‧ 명언‧ 명시‧ 명화‧ 고대7대 불가사의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우리에게 깊은 사유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 명언들은 과거의 지혜자들이 남긴 메시지로, 각기 다른 배경과 시대 속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는 명언을 필사하며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이를 통해 스스로의 삶에 의미를 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인생은 매 순간이 소중하며, 우리는 그 순간들을 통해 더 나은 존재로 성장해 나갑니다. 이 책이 여러분의 삶에 작은 빛이 되고, 더 깊은 이해와 인식을 가져다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함께 나누는 이 길이 여러분 각자의 여정에서 소중한 순간이 되길 바랍니다.
이제 여러분과 함께 이 글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와 감정들을 필사하며,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