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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번역

이름:정지인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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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어떤 죽음의 방식>

빛을 먹는 존재들

생각해 보면 엄청난 일이다. 우리는 숨 쉬는 매 순간, 음식을 먹는 모든 순간, 우리 존재를, 생명 자체를 고스란히 식물에 빚지고 있다. 실로 과학은 우리의 불완전하고 둔한 감각을 확장하여 세상을 더 넓고 깊고 세밀하게 보게 한다. 이제 겨우 눈을 뜨고, 시야를 가린 눈곱을 떼어내며 조금씩 선명하게 보기 시작한 우리가 잡아갈 새로운 변화의 방향은 이 거대한 생명의 세계에서 우리가 차지한 자리를 조금 더 정확히 이해하고, 그 세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다른 생명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할지 바른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욕구들

캐럴라인 냅이 몇 년에 걸쳐 쓴 『욕구들』은 한층 더 깊이 들어가 욕구에 얽힌 모든 문제와 원인을 철저하게 규명한다. 시선은 더 깊어지고 시각은 더 넓어졌다. 그 시선 아래서 거식증(을 비롯해 폭식증, 쇼핑 중독, 자학과 자해, 자기 파괴적 연애, 도벽 등 욕구와 얽힌 온갖 문제들)은 한 개인만의 괴로움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모든 이가 피할 수 없는 괴로움을 표출하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 사회와 세상은 그 괴로움의 근원으로 드러난다. 여자의 욕구와 페미니즘의 관계, 그리고 여자와 사회가, 사람이 세상과 만나는 곳에서 생겨나는 불안, 두려움, 죄책감, 수치심, 슬픔 같은 깊고 넓은 ‘감정의 바다’에 관해 캐럴라인 냅만큼 잘 설명해줄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이토록 아름다운 뇌

뇌에 관한 납작한 인식, 추상성의 안개를 걷어준 책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은 거의 모든 뇌과학 책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자 ‘현대 신경과학의 창시자’라 불리는 인물이다. 창시자란 한 분야를 말 그대로 창조했다는 의미일 텐데, 이런 명칭이 지닌 무게에 비해 그는 소수 전문가들의 범위 밖에서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게다가 그 분야란 것이 오늘날 너무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뇌과학 아닌가. 그간 우리가 들었던 이야기는, 카할이 현미경으로 뇌 조직을 관찰하여 그림으로 그렸다는 것, 그리고 뉴런이 (당시의 광학현미경으로는 잘 보이지도 않던) 시냅스로 분리된 개별 세포라는 걸 알아냈다는 점 정도로, 대부분 몇 줄로 요약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물론 ‘이 정도’도 현대 뇌과학의 창시자로 자리매김할 만큼 결정적인 일이다. 언젠가 아마존에서 이 책 《이토록 아름다운 뇌》를 보고는 ‘카할의 도판집이 다 나왔네?’라며 대단하고 독특한 기획이라고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나라에서는 나오기 어려운 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도 아닌 데다 뉴런 그림을 모은 도판집이라니 누가 이런 책을 낼까 싶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번역을 위해 자료 조사를 하다가 이 책의 속지를 넘겨가며 보여주는 유튜브 영상을 발견했다. 보는 순간 ‘우와, 우와’ 하는 내적 탄성이 터져 나왔고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단 몇 줄로 요약되던, 바람 빠진 풍선 같던 라몬 이 카할과 뇌에 관한 납작한 인식에 공기가 들어차며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홀린 듯 그 자리에서 당장 책을 주문했다. 직접 펼쳐보니 동그랗기만 하던 풍선이 뇌처럼 올록볼록해지며 더 구체적인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흔히 책에서 보던 ‘가지가 몇 개 달린 긴 성냥개비’처럼 그려진 도해들이 얼마나 추상적이었는지, 그리고 실제와 얼마나 거리가 멀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뇌과학 책들의 문장을 읽으며 뉴런의 정보 전달 방식을, 시냅스에서 일어나는 일을, 뇌 회로의 연결을 상상하며 머리를 굴려볼 때는 안갯속처럼 모호했는데, 카할이 직접 그린 뉴런과 신경 조직 그림을 보며 설명을 읽으니 그런 추상성의 안개가 걷히며 시야가 맑아지고 입체성을 띠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이 책은 단지 라몬 이 카할의 뇌 조직 그림만 담은 책은 아니었다. 실험복을 입고 현미경 앞에 앉아 있는 흑백사진 속 뚱한 남자의 이미지 뒤에는 예술가와 반항아의 기질이 부글거리고 있었고, 하나에 꽂히면 끝까지 파고 들어가는, 아무도 못 말릴, 그러다 기어이 뭔가의 ‘창시자’가 되게 하고야 마는 덕후 본능이 있었다. 그 삶의 이야기가 또 너무 흥미로워서 나는 카할의 자서전을, 그것도 영어판과 스페인어판을 몽땅 사고 말았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카할의 그림은 2900 점이라지만, 본인의 말로는 1만2천 점을 그렸다고 한다. 카할이 현미경으로 미세한 뇌 절편들을 들여다보고 그림을 그렸을 무수한 순간들을 상상해본다. 이전까지 아무도 탐사한 적 없던, 완전한 미지의 영역을 눈으로 탐험하며 세상 누구보다 먼저 뇌 속 비밀스러운 풍경과 구성 요소들을 발견하고 결국 이해하게 되는 일은, 고되긴 했겠지만 얼마나 큰 희열을 안겨주었을까. 아무리 상상해봐도 나로서는 결코 그 감정의 크기와 깊이를 알 수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이 책에 꽂힌 나는 책을 내줄 출판사를 찾기 시작했다. 도판집이라는 특성상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출판사여야 엄두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군데 문을 두드리고 편집자의 뜨거운 공감을 얻었으나 회사를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고, 또 다른 출판사 역시 그랬다. 예상대로 쉽지 않은 기획이었다. 줄곧 함께 일해온 아몬드에서 내준다면 제일 좋겠는데, 과연 일인출판사가 감당할 수 있을까? 그래도 한번 얘기해보자 하고 아몬드에 제안했을 때, 처음에는 못 한다고 손사래를 치던 대표님도 이내 책의 매력과 (희미한) 가능성을 보고 마음을 열어주셨고 결국에는 의기투합해 출간으로 이어지게 됐다. 큰 출판사들도 어렵다고 포기한 모험에 용감하게 나서준 대표님께 감사드린다. 나는 신나서 제안하고 번역만 했을 뿐, 이 책을 만들어내는 실질적이고 힘든 일은 모두 아몬드의 몫이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 책의 매력에 흠뻑 빠질 독자분들이 많았으면 좋겠고, 그래서 일인출판사 아몬드의 이 모험에 큰 응원을 보내주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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