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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김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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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인간 문화의 겉과 속 5>

갈팡질팡(不知所措) 인간 세상 이야기 1

이 책 쓰면서 인간 세상은 이유 없이 개에게 탓하곤 한다. 겨울 담장에 소복이 솟아오른 말고 흰 눈이 견심(犬心)인 듯한 데 말이다. 인간들은 허구한 날 모든 것이 개 같은 세상 탓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싶다. 한마디로 이런 세상 어떻게 사느냐고 하면서 애꿎은 네발짐승을 탓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도 이런 심각한 논박에 있어서 아주 흥미로운 점이 있다. 인간들은 개 같은 세상이라고 빗대면서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탓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주체가 자신들이란 점은 애써 외면하고 싶어 한다는 점이 볼썽사납기도 하다. 어쨌든 이 세상에 사는 개들이 뭐라 한 적은 없지 않은가? 단지 이 세상에 개들은 주인이 가난뱅이든 부자든 상관없이 주인이니까 꼬리치고 맴맴 돌고 멍멍 짖는다. 아울러 어떤 경우이든 개는 주인이 기분에 따라 부르는 명칭이 이름이 된다. 주인이 즐겁다고 메리(Merry)라 부르면 메리(즐거운 강아지)가 되고, 행복할 때 해피(Happy)라 부르면 해피(행복한 강아지)가 되어 주인의 기분을 충족 시켜 준다. 우리 주변에서 어찌 개만 한 충복(忠僕)이 따로 있겠는가 싶은 대목이기도 하다. 그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개는 반려견(伴侶犬)이요 고양이를 포함한 귀여운 동물을 애완동물(愛玩動物)이라는 세상에 살고 있다. 사실 핵가족 시대에 머무는 인간에겐 쓸쓸한 단면이지만 인간에게 개만큼 소중한 벗도 없다. 어쨌든 이 시대를 이끄는 인간이기에 지혜롭고 슬기롭게 살아가야 할 숙제도 인간에게 주어진 듯하다. 이런 이유로 인간이 살아온 그 험난한 여정을 과거와 현재 속의 맑고 맑은 강아지의 눈빛으로 바라봄이 새로운 의미를 주는 듯이 비쳐온다. 아마도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은 격세지감(隔世之感)이란 말속에 삶의 흔적을 옮기는 듯하다. 사실 요즘 도심 골목에선 기발한 아이디어로 등장하는 애견 숍의 간판이 눈길을 끈다. 예를 들면, “멍멍아 야옹 해봐” 등인데, 사실 멍멍이가 어떻게 야옹야옹하겠는가? 우리 주변이 그럴 정도로 삶 속에 여유가 생겨서 그런 세상으로 변해갔으면 하는 바람이 살짝 담겨 있는 표현일 것이다. 여하튼 이보다 좀 더한 이야기가 야릇한 기분을 쏟아내기도 한다. 애견 숍 용품이나 사각 진열대에 갇힌 강아지들이 껌을 질겅질겅 씹어대는 시절이 찾아온 것이 요즘이기도 하다. 어쩜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불현듯 근래에 벌어졌었던 해외 토픽감이 머릿속을 스쳐 간다. 미국의 어느 견주(犬主)가 강아지와 산책을 하던 도중에 호숫가를 빙 돌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 이때 불쑥 나타난 새끼 악어가 강아지를 덥석 물어버린 것이다. 그 당시에 당황한 개 주인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악어의 주둥이를 벌리고 강아지를 구해냈다는 영화 속 장면 같은 신문 기사 내용이었다. 우리 일상 속에서 개의 위상이 차지하는 비중이 장난이 아님은 분명히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물론 서구 문명국가에서는 집안에 갇혀 있는 강아지의 스트레스를 고려해서 일주일에 두세 번 산책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는 한다. 사실 이 정도면 옛 어른이 말씀하신 개 팔자가 상팔자요 개가 주인인 시절이 맞을 것이다. 아울러 우리 주변에서 복슬강아지가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이 분명하다. 아주 어린 시절에 강아지에 대한 추억도 남다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당시엔 흙 마당에서 뒹굴며 주인의 뒤를 졸졸 쫓아가는 누렁이가 대부분이었다. 사실 어찌 누렁이만 있었겠는가? 간혹 검둥이도 있었고, 흰둥이도 메리(즐거운 강아지), 해피(행복한 강아지)라고 주인이 부르는 대로, 한글을 쓰는 땅 위에서 외국어 이름을 사용하는 친구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요즘의 귀여운 복장과 웰빙 문화의 혜택을 받으면서 영양 상태까지 완벽한 강아지와는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싶다. 사실 그 당시 아주 열악한 주거상태에서 귀여운 친구가 누렁이었다는 기억이 또렷하다. 어쩌면 비교가 안 되는 생활문화의 여건에서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것이 개의 일생이요 개 팔자라고 말이다. 이쯤에서 잠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지금의 귀엽고 토실토실한 강아지가 그러하듯, 당시의 복 돌이 복순이도 누렁이란 이름으로 혹은 검둥이와 흰둥이란 이름을 오가며 주인에게 충성(忠誠)을 다하는 충견(忠犬)이었다는 점이다. 매일매일 학교 갔다 집에 오면 반갑다고 마당을 뱅뱅 돌며 꼬리 치고 반겨준다. 그런데 어찌 이뿐인가 싶은 순간에는 누렁이 생(生)의 마지막이 찾아온다. 어느 날 사라진 강아지는 혹서의 계절 여름철에 주인의 영양보충을 위한 보신탕(補身湯)으로 변해 있었다. 이를테면 인류를 위한 최후의 봉사로 어느 가정에서인가 건강의 일선에서 최후의 생(生)을 마쳤던 것이었다. 2021년 9월 海東 김용수 씀

종횡무진(縱橫無盡) 사람사는 이야기 4

소설 종횡무진은 2005년 2월 출간된 송현우 작가의 무협소설, 한국 최초의 책빙의물이다. 2006년 12월 전 10권으로 완결되었다. 탄탄한 구성과 전개내용으로 인해 상당한 수작으로 평가받으며, 훗날 2010년대 이후 웹소설 시대에 들어서 유행했던 책빙의물의 여러 가지 요소들을 모두 구현한 선구적인 작품이다. 조용해 보이기만 하던 강호에 홀연히 나타나 정사양도(正邪兩道)를 희롱하는 희대의 괴걸 여도획걸괴(如盜獲乞怪) 채(蔡)가. 그는 보기 드문 채음적(採陰賊)이었고, 뛰어난 해결사(解決士)였으며, 불세출의 탕아(蕩兒)였고, 천하에서 제일가는 싸움꾼이었다. 모두가 그를 알고 있지만, 아무도 그를 몰랐다. 그가 뒤흔든 한 달 동안에 무림의 역사는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으니...... 이름도 모르고 성만 알려진 신비의 사나이가 강호무림을 종횡으로 누비고 다니며 벌이는 포복절도할 일대소동과 통쾌무비한 활극! 종횡무진(縱橫無盡)의 사전적 의미는 행동 따위가 자유자재로 거침이 없음이다. 졸고(拙稿) ‘종횡무진 사람사는 이야기 4’는 소설 종횡무진을 읽으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이야기를 좀 더 가까이에서 엿들어보고자 한 점에 의미를 두고자 한다. 어떤 재산가가 자신을 ‘억대 거지’라고 표현하는 말을 하는 적이 있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마음의 가난을 면할 수 없다는 하소연이었다. 환자를 고치는 의사가 자신을 마음의 병자라고 표현하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자신의 직업에서 보람을 느낄 수 없다는 의미였다. 재산이나 명예, 권력을 지닌 사람도 자신의 인생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하는 경우를 종종 접하게 된다. 남이 들으면 배부른 푸념이라고 비난을 받을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외형적인 성공이나 성취가 반드시 인생의 성공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우리 사회는 오직 성공과 성취만 중시하는 목표 제일주의 경향이 강하지만 실제 인생에서는 성공과 성취 이후의 삶을 어떻게 펼쳐 가는가에 따라 인생의 전체적 의미가 달라진다. 성공하고 성취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것이 곧 인생의 기쁨과 보람으로 직결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성공과 성취는 개인적인 차원의 이룸이다.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남과 경주하여 자신의 목표를 이뤄낸다. 돈을 벌고 부를 이루고 자격을 얻으며 명성을 얻는 일이 모두 그것에 해당한다. 하지만 성공과 성취를 통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은 뒤부터는 자신의 전문성을 세상과 공유하고 나누는 일에 써야 한다. 돈을 많이 번 사람은 그것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의사가 된 사람은 자신의 의술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치료해야 한다.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신념으로 착한 일을 하면서도 물 위를 걷듯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부와 권력 명성에 대한 책임과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나눌 줄 모르는 재산은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고 이바지할 줄 모르는 전문성은 단지 돈을 버는 기술로 전락하고 만다. 성공과 성취는 세상으로 나아가 이바지하고 기여해도 좋다는 훌륭한 자격을 의미한다. 워런 버핏과 빌 게이츠가 자신의 재산을 세상에 나누는 일에 골몰하는 건 그것이 성공과 성취보다 훨씬 소중하고 값진 차원임을 알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물적 가치로 바꿀 수 없는 근원적인 기쁨과 보람이 있고 그것은 세상을 밝히는 광휘로 되살아난다. 세상에 성공하고 성취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것을 세상에 밝히는 발판이나 거름으로 삼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부와 명예를 얻고도 우울증에 시달리고 전문직에 종사하면서도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 오직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 자신 안에 갇힌 삶을 살기 때문이다. 인생의 기쁨과 보람은 성공과 성취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그것을 발판 삼고 거름 삼아 세상에 이바지하고 기여할 때 비로소 온전한 생명의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 그것이 나눔이고 그것이 공존이다. 나눔을 통한 공존, 공존을 통한 나눔은 생명세계의 근원적인 그물망이다. 반드시 성공하고 성취해야만 나눔과 공존에 기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의 하는 일의 의미를 개인적 차원에 국한하지 않고 세상과의 연결고리로 삼으면 보람과 기쁨의 근거가 절로 눈을 뜬다. 우리는 모두 ‘나’라는 낱단위에서 출발하지만 나눔과 공존의 의미에 눈을 뜨면 ‘작은 나’는 죽고 모두가 하나 되는 우주적 자아가 눈을 뜬다. 나누는 마음, 그것이 곧 모든 것을 여는 마음이다. 베푼다는 건 자신에게 필요 없는 걸주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도 소중한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기에. 코로나 때문에 일상을 살기도 어렵고 더구나 서민들은 주머니가 가벼워져 살림살이가 평범한 일상이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지만, 세모의 길거리에 구세군의 자선냄비에 약소하나마 나눔의 성의를 베푸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따뜻하고 훈훈한 종횡무진(縱橫無盡)하는 삶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1년 2월 - 이 책 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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