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점에서 리쾨르의 해석학은 타인의 심리를 이해하려는 딜타이 류의 낭만주의 해석학에서 벗어나 하이데거적인 존재론적 이해로서의 해석학과 만난다. 그러나 텍스트를 통한 자기 이해라는 먼 길을 택한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와는 다르다. 반성철학, 현상학 그리고 기호, 상징, 텍스트의 매개를 통한 해석학은 직관에 의한 투명한 자기 인식의 꿈을 포기하고 길고도 먼 우회로를 통해 자기 이해-세계 이해에 이르고자 한다.
리쾨르의 이야기론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이 텍스트 해석학을 이해하는 것이 된다. 텍스트를 해석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텍스트 내에서 작품의 구조화를 지배하는 내적 역동성을 찾아내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텍스트를 넘어 텍스트가 가리키는 세계, 텍스트가 담고 있는 '것chose'이라 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 내는 작품의 힘을 찾아내어 독자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해석학은 구조주의를 수용함으로써 상징을 탈신화화하고, 텍스트가 보여주는 존재 이해를 받아들임으로써 구조주의를 넘어선다.
이처럼 해석학을 "어떤 해석, 다시 말해서 단일한 텍스트나 하나의 텍스트로 여겨질 수 있는 일군의 기호들에 대한 해석을 지배하는 규칙들에 대한 이론"으로 정의한다면, 그의 해석학은 언어학, 정신분석, 신학, 사회학, 정치학 등 다양한 해석 방식(해석학)과의 만남(갈등)을 통해 말의 뜻이 속한 여러 가지 층위를 골고루 더듬어 삶의 뜻과 연결시키는 종합적 해석학, 또는 해석의 일반 규칙을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말의 뜻을 푸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말뜻을 통해 삶의 뜻으로 나아가는 것이 리쾨르 해석학의 특징이다.
사실 "허구 이야기에서의 시간의 형상화"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시간과 이야기』2권은 나머지 두 권에 비해 가장 '문학적'이다. 특히 버지니아 울프, 토마스 만, 프루스트의 작품을 분석한 부분은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때로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는 리쾨르의 이론에 짓눌리지 않으려면 이 부분부터 읽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또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시간과 이야기』1, 2권의 요점을 중심으로 옮긴이 해제를 마련하여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은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000년 12월 19일 알라딘에 보내신 작가 코멘트)
리쾨르의 주된 관심 영역은 다양한 '해석들의 갈등'이 일어나는 곳이다. 주체, 시간, 구조와 역사, 텍스트와 삶, 정체성 등이 그렇다. 그러나 갈등을 푸는 리쾨르의 방식은 어느 한편의 손을 들어주기보다는, 다양한 해석들을 대조함으로써,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 대립되는 해석을 대치시키고 겹쳐놓음으로써, 해석들의 갈등을 '중재'하고자 한다. 각각의 해석이 갖는 한계와 가능성을 탐색하면서 '메마른 논쟁'이 아니라 '사랑에 가득찬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 리쾨르가 택한 방법론을 우리는 상징 해석학을 발전시킨 텍스트 중심의 해석학, 그러나 폐쇄된 기호체계로서의 텍스트가 아닌 밖을 향해 열린 텍스트 해석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기호, 상징 그리고 텍스트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자기 이해는 없다.
자기 이해는 궁극적으로 이 매개항들에 적용된 해석과 일치한다.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넘어가면서, 해석학은 점차적으로 후설이 현상학과 동일시하고자 했던 관념론으로부터 벗어난다." 기호, 상징, 텍스트를 매개로 한 자기 이해라는 측면에서 리쾨르의 해석학은 코기토 중심의 반성철학의 한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리쾨르가 말하는 텍스트는 문화에 의해 전승된 상징이다. 그러나 기호나 상징과는 달리 글로 쓰여진 텍스트는 담론(누가 누구에게 무엇에 관해 무엇을 말한다)으로서, 어떤 세계, 리쾨르가 '텍스트 세계'라고 부르는 것을 텍스트 밖으로 투사한다. 그렇게 이해된 텍스트는 글 쓴 사람의 뜻(의도)으로부터, 글을 읽는 사람의 뜻으로부터, 글을 쓸 당시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으로부터의 벗어나 의미론적 자율성을 얻게 된다.
이 점에서 후설의 지향성으로부터, 해석의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난다. "자기를 이해한다는 것, 그것은 '텍스트 앞에서'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며, 책을 읽는 나와는 다른 자기의 조건을 텍스트에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뒷편에 계속)
리쾨르의 주된 관심 영역은 다양한 '해석들의 갈등'이 일어나는 곳이다. 주체, 시간, 구조와 역사, 텍스트와 삶, 정체성 등이 그렇다. 그러나 갈등을 푸는 리쾨르의 방식은 어느 한편의 손을 들어주기보다는, 다양한 해석들을 대조함으로써,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 대립되는 해석을 대치시키고 겹쳐놓음으로써, 해석들의 갈등을 '중재'하고자 한다. 각각의 해석이 갖는 한계와 가능성을 탐색하면서 '메마른 논쟁'이 아니라 '사랑에 가득찬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 리쾨르가 택한 방법론을 우리는 상징 해석학을 발전시킨 텍스트 중심의 해석학, 그러나 폐쇄된 기호체계로서의 텍스트가 아닌 밖을 향해 열린 텍스트 해석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기호, 상징 그리고 텍스트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자기 이해는 없다.
자기 이해는 궁극적으로 이 매개항들에 적용된 해석과 일치한다.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넘어가면서, 해석학은 점차적으로 후설이 현상학과 동일시하고자 했던 관념론으로부터 벗어난다." 기호, 상징, 텍스트를 매개로 한 자기 이해라는 측면에서 리쾨르의 해석학은 코기토 중심의 반성철학의 한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리쾨르가 말하는 텍스트는 문화에 의해 전승된 상징이다. 그러나 기호나 상징과는 달리 글로 쓰여진 텍스트는 담론(누가 누구에게 무엇에 관해 무엇을 말한다)으로서, 어떤 세계, 리쾨르가 '텍스트 세계'라고 부르는 것을 텍스트 밖으로 투사한다. 그렇게 이해된 텍스트는 글 쓴 사람의 뜻(의도)으로부터, 글을 읽는 사람의 뜻으로부터, 글을 쓸 당시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으로부터의 벗어나 의미론적 자율성을 얻게 된다.
이 점에서 후설의 지향성으로부터, 해석의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난다. "자기를 이해한다는 것, 그것은 '텍스트 앞에서'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며, 책을 읽는 나와는 다른 자기의 조건을 텍스트에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뒷편에 계속)
이 점에서 리쾨르의 해석학은 타인의 심리를 이해하려는 딜타이 류의 낭만주의 해석학에서 벗어나 하이데거적인 존재론적 이해로서의 해석학과 만난다. 그러나 텍스트를 통한 자기 이해라는 먼 길을 택한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와는 다르다. 반성철학, 현상학 그리고 기호, 상징, 텍스트의 매개를 통한 해석학은 직관에 의한 투명한 자기 인식의 꿈을 포기하고 길고도 먼 우회로를 통해 자기 이해-세계 이해에 이르고자 한다.
리쾨르의 이야기론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이 텍스트 해석학을 이해하는 것이 된다. 텍스트를 해석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텍스트 내에서 작품의 구조화를 지배하는 내적 역동성을 찾아내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텍스트를 넘어 텍스트가 가리키는 세계, 텍스트가 담고 있는 '것chose'이라 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 내는 작품의 힘을 찾아내어 독자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해석학은 구조주의를 수용함으로써 상징을 탈신화화하고, 텍스트가 보여주는 존재 이해를 받아들임으로써 구조주의를 넘어선다.
이처럼 해석학을 "어떤 해석, 다시 말해서 단일한 텍스트나 하나의 텍스트로 여겨질 수 있는 일군의 기호들에 대한 해석을 지배하는 규칙들에 대한 이론"으로 정의한다면, 그의 해석학은 언어학, 정신분석, 신학, 사회학, 정치학 등 다양한 해석 방식(해석학)과의 만남(갈등)을 통해 말의 뜻이 속한 여러 가지 층위를 골고루 더듬어 삶의 뜻과 연결시키는 종합적 해석학, 또는 해석의 일반 규칙을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말의 뜻을 푸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말뜻을 통해 삶의 뜻으로 나아가는 것이 리쾨르 해석학의 특징이다.
사실 "허구 이야기에서의 시간의 형상화"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시간과 이야기』2권은 나머지 두 권에 비해 가장 '문학적'이다. 특히 버지니아 울프, 토마스 만, 프루스트의 작품을 분석한 부분은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때로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는 리쾨르의 이론에 짓눌리지 않으려면 이 부분부터 읽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또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시간과 이야기』1, 2권의 요점을 중심으로 옮긴이 해제를 마련하여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은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000년 12월 19일 알라딘에 보내신 작가 코멘트)
이 점에서 리쾨르의 해석학은 타인의 심리를 이해하려는 딜타이 류의 낭만주의 해석학에서 벗어나 하이데거적인 존재론적 이해로서의 해석학과 만난다. 그러나 텍스트를 통한 자기 이해라는 먼 길을 택한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와는 다르다. 반성철학, 현상학 그리고 기호, 상징, 텍스트의 매개를 통한 해석학은 직관에 의한 투명한 자기 인식의 꿈을 포기하고 길고도 먼 우회로를 통해 자기 이해-세계 이해에 이르고자 한다.
리쾨르의 이야기론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이 텍스트 해석학을 이해하는 것이 된다. 텍스트를 해석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텍스트 내에서 작품의 구조화를 지배하는 내적 역동성을 찾아내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텍스트를 넘어 텍스트가 가리키는 세계, 텍스트가 담고 있는 '것chose'이라 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 내는 작품의 힘을 찾아내어 독자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해석학은 구조주의를 수용함으로써 상징을 탈신화화하고, 텍스트가 보여주는 존재 이해를 받아들임으로써 구조주의를 넘어선다.
이처럼 해석학을 "어떤 해석, 다시 말해서 단일한 텍스트나 하나의 텍스트로 여겨질 수 있는 일군의 기호들에 대한 해석을 지배하는 규칙들에 대한 이론"으로 정의한다면, 그의 해석학은 언어학, 정신분석, 신학, 사회학, 정치학 등 다양한 해석 방식(해석학)과의 만남(갈등)을 통해 말의 뜻이 속한 여러 가지 층위를 골고루 더듬어 삶의 뜻과 연결시키는 종합적 해석학, 또는 해석의 일반 규칙을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말의 뜻을 푸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말뜻을 통해 삶의 뜻으로 나아가는 것이 리쾨르 해석학의 특징이다.
사실 "허구 이야기에서의 시간의 형상화"라는 부제가 말해주듯이, 『시간과 이야기』2권은 나머지 두 권에 비해 가장 '문학적'이다. 특히 버지니아 울프, 토마스 만, 프루스트의 작품을 분석한 부분은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때로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는 리쾨르의 이론에 짓눌리지 않으려면 이 부분부터 읽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또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시간과 이야기』1, 2권의 요점을 중심으로 옮긴이 해제를 마련하여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은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000년 12월 19일 알라딘에 보내신 작가 코멘트)
리쾨르의 주된 관심 영역은 다양한 '해석들의 갈등'이 일어나는 곳이다. 주체, 시간, 구조와 역사, 텍스트와 삶, 정체성 등이 그렇다. 그러나 갈등을 푸는 리쾨르의 방식은 어느 한편의 손을 들어주기보다는, 다양한 해석들을 대조함으로써,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 대립되는 해석을 대치시키고 겹쳐놓음으로써, 해석들의 갈등을 '중재'하고자 한다. 각각의 해석이 갖는 한계와 가능성을 탐색하면서 '메마른 논쟁'이 아니라 '사랑에 가득찬 전투'를 벌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 리쾨르가 택한 방법론을 우리는 상징 해석학을 발전시킨 텍스트 중심의 해석학, 그러나 폐쇄된 기호체계로서의 텍스트가 아닌 밖을 향해 열린 텍스트 해석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기호, 상징 그리고 텍스트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자기 이해는 없다.
자기 이해는 궁극적으로 이 매개항들에 적용된 해석과 일치한다.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넘어가면서, 해석학은 점차적으로 후설이 현상학과 동일시하고자 했던 관념론으로부터 벗어난다." 기호, 상징, 텍스트를 매개로 한 자기 이해라는 측면에서 리쾨르의 해석학은 코기토 중심의 반성철학의 한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리쾨르가 말하는 텍스트는 문화에 의해 전승된 상징이다. 그러나 기호나 상징과는 달리 글로 쓰여진 텍스트는 담론(누가 누구에게 무엇에 관해 무엇을 말한다)으로서, 어떤 세계, 리쾨르가 '텍스트 세계'라고 부르는 것을 텍스트 밖으로 투사한다. 그렇게 이해된 텍스트는 글 쓴 사람의 뜻(의도)으로부터, 글을 읽는 사람의 뜻으로부터, 글을 쓸 당시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으로부터의 벗어나 의미론적 자율성을 얻게 된다.
이 점에서 후설의 지향성으로부터, 해석의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난다. "자기를 이해한다는 것, 그것은 '텍스트 앞에서'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며, 책을 읽는 나와는 다른 자기의 조건을 텍스트에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뒷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