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첨단을 뽐내는 이미지에서 빠지지 않는 컴퓨터 그래픽이 본질적으로는 르네상스 시대의 선원근법을 벗어나지 못했다니, 우주선 마젤란 호가 찍은 금성의 대기사진을 보면서 터너의 낭만주의적 관점을 생각한다니, 재미있지 않은가. 해부학 도해와 각종 분자모델에도 저마다 무슨 미술 양식처럼 시대적인 특징이 있다니 솔깃하지 않은가.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패턴 인식에 대한 ‘구조적 직관’을 형성해왔다고? 그렇다면 하늘에 떠가는 구름에서 쉽게 토끼, 호랑이, 고래 같은 동물 모양을 발견하는 것이 단지 어린 마음의 상상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며, 벽지 위에서 의미 없이 반복되는 넝쿨무늬 속에서 소름끼치게 웃는 마녀나 뿔 달린 괴물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단지 심리상태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직관 속에 포함되지 않아서, 우리가 감각할 수단이 없어서, 우리 종이 진화시켜온 눈의 특성과 한계 때문에, 우리가 그 안에 존재하지만 ‘보지’ 못하는 수많은 차원들은 또 어떻고.
무모한 야심으로 파멸을 자초했던 과학자의 이름 프랑켄슈타인은 20세기 대중문화 속에서 작가인 메리 셸리의 이름보다 더 유명해지면서 원래는 이름조차 없었던 그 괴물의 이름으로 대신 사용되었다. 그리고 그 괴물의 모습은 많은 시각 매체 속에서 반복되어 등장하면서 거의 정형화될 정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과학이 발달하고 있는 21세기에 프랑켄슈타인은 단순히 공포를 불러오는 괴물로 기능하지 않는다. 생명 과학과 생명 복제 기술이 사회적 합의나 정서를 훨씬 앞질러가는 오늘날 사회에서, 오래전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통해 던졌던 질문은 우리에게 과거 어느 때보다 절실하고 절박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