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의 정념들』은 발리바르가 평생 ‘이끌어 온’, 아니 자신조차 누구와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야 할지 전혀 몰랐으므로, 평생을 ‘바친’ 이러한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텍스트다. 알튀세르에 이끌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지적 이력을 시작했지만, 알튀세르와 함께 그가 마주하게 된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아포리아였고,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주의가 진리가 아님을 혹은 마르크스주의가 그가 생각했던 의미의 진리는 아니었음을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깨달은 뒤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고 해체하는 사상들의 편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병법에서 말하듯 적의 관점에서 우리를 바라봄으로써 우리의 사유를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파괴하고자 적의 곁에서 사유하기 위해서 말이다.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주의를 위해 마르크스주의에 반해 사유했던 은밀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것이 아니라 정말로 마르크스주의의 아포리아와 대결하기 위해, 그래서 필요하다면 마르크스주의를 버리기 위해 마르크스주의 바깥에서 사유했다. 발리바르에게는 마르크스주의조차, 더 나아가서는 프랑스 철학조차 사유의 준거점일 수 없었다. 발리바르는 또 한 명의 배신자일까? 사실 발리바르는 사유의 준거점이라는 관념 자체를 갱신한 사상가 아니었을까?
따라서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세계(또는 ‘다시 만난 세계’)를 만드는 그러한 혁명을 위한 무기는 바로 이 자본주의라는 구조를 분석할 수 있게 해주는 사유, 결국 이 탁월한 책이 보여주듯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론이다.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가 오늘날 지금 여기 우리가 놓여 있는 이 현실에서 가장 필요불가결한 사유라는 점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대신 이 책은 이 점을 전제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목표를 마르크스주의로 되돌아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오해를 걷어내는 충실한 ‘읽기’를 수행하는 것으로 삼는다(이 책은 이 자본주의라는 구조를 분석하게 해주는 필수불가결한 사유의 도구로서 마르크스주의를 다수의 관련 참고문헌에 대한 성실하고 집요한 읽기를 통해 매우 평이한 방식으로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방금 언급했듯 탁월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감수자가 속해 있던 세대가 마르크스주의의 ‘끝물’ 속에서 그 세례를 받을 수 있게 해주었던 것과 달리, 저자가 속해 있는 세대는 선배들과 선생들의 무능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의 세례를 전혀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저자는, 알튀세르가 애용했던 이런 표현을 쓰자면, 어떠한 ‘고독’ 속에서, 다양한 마르크스주의의 조류들을 공부하고, 그 기본(작금의 표현으로는 ‘근본’)을 나름의 방식으로 추출해 이 책 안에 정갈한 방식으로 담아냈다. 이러한 작업은 저자가 속해 있는 세대를 고려한다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인데도 말이다. 고독한 공부를 통과해 이 훌륭한 책을 새로운 세대의 동료 시민들에게, 그리고 감수자와 같은 선배들과 선생들에게 전해준 저자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