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 서문
「여성과 범죄」의 원제는 「여성범죄자: 여자청소년, 여성, 그리고 범죄(The female offender: Girls, women and crime)」다. 이 책을 처음 접했던 것은 제3판이 출간되었던 2013년이었다. 박사과정 때 있었던 독일의 막스플랑크 비교형법 및 국제형법연구소(지금은 막스플랑크 범죄·안전·법 연구소로 명칭이 바뀌었다)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출간된 범죄학 분야 신간이 수시로 들어왔는데, 사서는 분기당 한 번꼴로 신간 중 다섯 권을 인트라넷에서 도서관 카탈로그를 접속할 때 보이는 첫 화면에 추천도서로 게시했다. 「여성과 범죄」는 2013년 봄에 사서가 추천한 다섯 권 중 첫 번째였다.
당시 「여성과 범죄」를 읽고 부끄러움과 놀라움이 교차했다. 1997년 제1판 출간부터 널리 반향을 일으켰던 이 책을 2013년에야 알게 되었다는 부끄러움의 감정은 -저자 또한 범죄학계의 성편향을 지적한 버나드의 표현(“수사슴 효과stag effect”)을 빌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동안 내가 남성의, 남성범죄학자에 의한, 남성범죄자를 위한 범죄학 연구만 배운 탓이라고 얼버무렸다. 놀라움은 우리나라의 척박한 범죄학 연구환경에서 과연 이러한 연구가 발표되거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하는 데서 기인했다. 그때 나는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연구가 나오기 위해서는 피해자 보호에 못지않게 가해자 처우도 중요하다는 점, 형사사법체계 내에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의 가시성을 높여야 한다는 점에 대한 공감대 형성 내지 인식전환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을 피해자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피해자가 아닌 범죄자로서의 여성을 섣불리 강조한다면 해방가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여성범죄의 물결’ 오해를 빚지 않을까 싶었다.
2017년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서 ‘교정시설 의료처우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면서 「여성과 범죄」를 다시 펼쳐보게 되었다. 교도소 한쪽 귀퉁이에 위치한 ‘여사(여자수용동의 줄임말)’에서 ‘바깥사람’을 만난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며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던 여성수용자들을 만나면서 과연 이들을 구금하는 것만이 유일한 범죄대응 전략인 것인지 새삼 혼란스러웠다. 실질적으로 재범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여성을 피해자로 바라보는 단선적인 시각을 넘어 범죄를 저지른 여성이 처한 환경을 이해하고 여성의 욕구를 반영한 전문적인 처우를 필요로 한다. 이는 「여성과 범죄」를 비롯한 페미니스트범죄학의 핵심적인 주장이기도 한데, 너무나 타당한 주장임에도 이를 역설하기에는 범죄를 저지른 여성을 바라보는 우리사회의 시선이 너무나 냉랭하다.
2020년 1학기 경찰대학 치안대학원에 ‘젠더와 범죄 세미나’ 강의를 처음 개설하면서 주교재로 「여성과 범죄」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수강생들에게 살짝 운을 띄워보니 메다 체스니-린드와 리사 파스코와 같은 페미니스트범죄학자를 낯설게 여기는 것은 2013년의 나와 다르지 않았다. 메다 체스니-린드는 2018년부터 2019년까지 미국범죄학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고, 그 사이 「여성과 범죄」는 제3판만도 국제적으로 2천회 이상 인용되는 범죄학의 대표적인 저서로 자리매김했는데도 말이다. 우리말로 옮겨 원서의 부담을 줄인다면 더 많은 학생들이 페미니스트범죄학을 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 책의 번역을 추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여성과 범죄」는 경찰대학 치안대학원에서 ‘젠더와 범죄 세미나’ 강의를 수강하였으며, 경찰교육기관 및 연구기관에 재직하고 있기도 한 박사과정생 세 명과 함께 우리말로 옮겼다. 개인의 관심을 반영해서 번역할 장을 정했으며, 7장과 8장은 김세령, 1장과 5장은 최재훈, 2장과 3장은 홍세은, 4장과 6장은 한민경이 책임 번역했다. 수강신청으로 말미암아 1년 넘게 이 주제에 천착하게 된 세 명의 공동역자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혼자였다면 지지부진했을 번역 작업에 큰 지지가 되었다. 앞으로 활발한 연구를 진행하게 될 공동역자들에게 이 책이 이정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번역 과정에서 나름 심혈을 기울였던 부분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영어 원문에 적합한 우리말을 고르는 작업이었다. 가장 고민스러웠던 단어는 무심하게 흔히 사용하는 단어이자 이 책에서 가장 많이 쓰인 단어 중 하나인 girl이었는데, ‘소녀’라는 번역어에서 느껴지는 서정성이 문맥에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해 언론보도 헤드라인 등에 쓰인 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급적 ‘여자청소년’으로 옮겼다. 통상 지위비행으로 번역해 온 status offences는 형법 저촉행위인 비행(delinquency)과의 모호한 경계가 여자청소년들이 형사사법체계에 대거 편입된 배경이라고 지적하는 저자의 의견을 감안하여 지위위반으로 달리 새겼다. 덧붙여, 네 명의 역자 간 차이가 없도록 용어의 통일성을 기하고자 노력했다. 또 하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 주를 충실하게 다는 작업이었다. 페미니스트범죄학은 범죄학, 사회학, 여성학의 성과가 융합된 학제적인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저자들은 학문적 경계를 초월하여 용어 내지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책을 읽는 도중 낯선 용어를 별도로 찾아보지 않아도 되도록 가급적 상세히 역자 주를 추가하였다. 또한, 원저자들이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어투를 사용한 경우에 대해서도 역자 주를 통해 문맥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원제인 The female offender부터가 여성범죄자는 생래적으로 타고났다고 보았던 ‘범죄학의 아버지’ 체사레 롬브로조의 「여성범죄자」를 비튼 것이다).
번역을 마친 2021년은 여성범죄자를 대하는 우리 사회와 형사사법체계의 시각에 상당한 변화가 요청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동부구치소 여성수용자들은 코로나19 확진자 파악을 위한 전수검사에서 “필요성도 없는데 예산 낭비”하지 않겠다는 이유로 검사에서 제외되었다. 교정시설 내 기본적인 의료처우도 이루어지기 어려운 상황에서 여성의 욕구를 고려한 교정프로그램을 제공할 것을 강조하는 역서를 내놓으려니 또 다른 맥락의 부끄러움과 놀라움이 교차한다. 캐서린 매키넌Catherine MacKinnon과 같이 페미니즘의 제2물결을 선도했던 페미니스트법학자의 주장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 유효하게 통용되고 있는 가운데, 형사사법체계에서 동등성parity의 원칙에 따라 남성과 여성을 동일하게 처우하는 것은 ‘보복이 있는 평등equality with a vengeance’이라고 일갈하는 저자의 주장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질지 자못 궁금하다. 한편, 올해부터는 특히 개정된 청소년성보호법이 시행됨에 따라 성매매에 유입된 아동청소년을 성매매 대상아동·청소년이 아닌 피해아동·청소년으로 규정하고, 이들에게 소년원 송치 등 보호처분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법적인 보호지원을 제공하게 되었다. 성매매에 연루된 아동청소년들을 피해아동·청소년으로 온전히 이해하는 데 이 책의 사유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자신의 저서가 번역된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기꺼이 한국어판 서문을 보내주신 원저자 메다 체스니-린드와 리사 파스코께 감사드린다. 이 책의 번역을 통해 좀더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스트범죄학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구체화 해주신 박영사, 그 중에서도 마케팅을 담당하는 오치웅 대리님과 편집을 맡아주신 우석진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2021년 2월
역자를 대표하여
서 문
젠더와 경찰활동 두 표현을 나란히 둔 이 책의 제목이 혹자에게는 형용모순처럼 어색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남성이 다수를 차지하고, 남성 중심적인 것이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경찰활동에 있어 젠더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비롯된 느낌일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렇게 젠더와 경찰활동을 서로 무관한 것으로 여기거나, 젠더와 경찰활동을 연결지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이들과 함께 젠더를 고려한 경찰활동을 이야기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2021년 이후 입학한 경찰대학생들은 성인지 교과목으로 지정된 ‘성인지 관점의 이해’와 ‘여성과 범죄’ 둘 중 하나를 필수로 이수하여야 한다. 페미니즘이나 젠더 관련 과목이 수강인원 부족으로 개설되지 못하고 있는 최근 일반대학의 여건과는 사뭇 다르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학생들이 젠더와 관련된 이야기를 낯설어 하는 점은 일반대학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점에서 “쉽게 읽히면서도 가볍지 않은 내용”은 집필진이 공유했던 핵심 목표였다. ‘성인지 관점의 이해’를 수강할 경찰대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글쓰기를 구상하며 집필진이 함께 내용을 추리고 논의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익숙하다고 여겨 온 사실의 재조명”, “좀 더 들여다보고 싶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료 제공” 등과 같은 학술적인 목표가 추가되었다. 이를 위해 본문의 길이를 미리 정해두고 내용을 압축해서 정리했으며, 출처 표기나 상세한 설명은 미주로 구분하였다. 또한, 본문과 별도로 개관, 학습목표, 주요용어, 생각해 볼거리, 찾아보기 등을 두어 내용의 이해와 심화를 돕고자 했다.
젠더와 경찰활동에 대한 학습과 이해는 비단 경찰대학생뿐만 아니라 경찰조직 구성원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이 책의 집필진들은 경찰 내 치안정책을 수립하고, 경찰관들을 교육하고, 수사를 진행하는 단계에서 성인지 관점을 반영한 경찰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해 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집필진들이 각기 다른 지역과 부서에 근무하면서도 이 책의 취지에 공감하고 바쁜 시간을 쪼개어 집필에 참여하였던 배경이다.
때로는 생각을 나눌 사람이 가까이 있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기도 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총액인건비 활용 일반임기제’로 임용되었던 경찰청 및 시·도경찰청 성평등정책담당자들은 2022년 말로 경찰조직을 떠나야 했고, 몇 개월간의 공백 후에 임용될 후임 담당자들은 2024년 말까지 한시적으로 근무할 예정이다. 집필진 중 몇 분도 그간 젠더 관점의 경찰활동에 대한 기여나 경찰조직에 대한 애정과는 별개로 경찰조직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 마주해야 했다. 가까이 있어 주셨음에 감사하고, 다시 가까이 와 주시기를, 가신 곳에서도 늘 마음은 연결되어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장기적으로는 ‘총액인건비 활용 일반임기제’와 같은 행정적인 이유로 성인지 관점을 반영한 경찰활동 추진이 단절되는, 안타깝고 씁쓸한 상황이 해소된다면 더 좋을 것이다. 경찰조직 내 성평등정책담당자들의 고용이 안정화되는 때가 온다면, 젠더를 고려한 경찰활동이 진일보하였을 것임이 분명하므로 이 책은 아마도 상당 부분 개정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때의 개정 작업은 너무나 기꺼운 일일 것임에 분명하다.
이 책은 주로 여성을 대상으로 발생하지만 비단 여성만이 피해자가 아니며, 젠더위계(gender hierarchy)와 관련되어 발생하는 모든 폭력을 통칭하기 위해 ‘젠더폭력범죄’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종래의 ‘성폭력’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지배, 소유, 억압, 통제하려는 의도에서 발생하였다는 점에서 성착취 및 스토킹과 공통점이 있다. 아울러, 이들 ‘젠더폭력’은 형사사법체계에 의해 규율되는 엄연한 ‘범죄’다. 즉, ‘젠더폭력범죄’는 성폭력(sex violence)이 아니라 젠더폭력(gender-based violence)을 이야기하고자 하며, 우리 형사사법체계상 젠더폭력이 범죄로 규율되고 있음을 명확히 하기 위해 집필진이 함께 고민한 끝에 택한 표현이다. 이러한 젠더폭력범죄의 정의에 따라 성희롱이나 직장 내 괴롭힘은 이 책에서 다루는 범위에서 제외되었으나, 이는 다분히 현행 형사사법체계를 반영한 데 따른 것으로, 2차피해 예방이나 피해자 보호·지원에 관한 이 책의 논의는 현재에도 성희롱이나 직장 내 괴롭힘에 충분히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젠더와 경찰활동이라는 제목도, 집필과정에서 추구했던 목표도 형용모순과도 같이 느껴질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그것이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질 수 있는 날이 있으리라 믿으며, 그 당연한 것을 위한 나름의 노력을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계속할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이 책의 기획을 지지해 주셨던 박영사의 정연환 과장님과 업무를 이어받아 마무리해 주신 장유나 과장님께 감사드린다.
2023년 2월
집필진을 대표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