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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정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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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류인석과 안중근의 독립운동>

류인석과 안중근의 독립운동

의암毅菴 류인석柳麟錫은 1895년 을미의병乙未義兵을 창의하고 일생을 의병운동에 헌신한 한국의병사의 상징적인 창의대장이다. 류인석의 연해주 의병활동이 『한국독립운동사자료』이하 독립운동사료에서 여러 차례 발견되지만 그에 대한 연해주의병 창의에 대한 연구업적은 없다.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독립운동은 하얼빈의거는 물론 연해주에서 활발한 의병활동을 벌렸음에도 상세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필자는 한국독립운동사를 관심 있게 검토하는 과정에서 선행연구자들이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독립운동사료를 크게 신뢰하지 않는 것에 의구심을 가졌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류인석에 관한 연해주의병과 관련된 많은 독립운동사료의 기사에 대해 등한히 취급하는 것에 상당한 잘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안중근安重根과 관련된 독립운동사료에 대해서도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가 필요하다고 여겨 왔다. 이와 같이 독립운동사료를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간혹 학자들이 독립운동사료에 실려 있는 기사를 인용하는 관례에 대해 더욱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독립운동사료를 인용하지 않고 연구가 정상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면 자료 활용은 연구자에게 선택의 권한이 있으므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연구는 이러한 필자의 궁금증에서 시작되었다. 즉 선행연구자들이 일제日帝의 수사ㆍ첩보자료에 불과하다고 독립운동사료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기존의 관행에 거부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국사편찬위원회는 많은 경비를 들여 가치 없는 독립운동사료를 편찬했나를 의심하기에 이르렀고, 이를 (사)화서학회華西學會 명의로 「의병편義兵編」에 대하여 사실적 가치가 있는 자료인가의 여부를 문의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는 「의병편」 등의 독립운동사료는 사실적 가치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독립운동사료에서 발견되는 류인석의 연해주의병 활동과 관련한 많은 기사가 그의 문집인 『의암집毅菴集』이하 문집에서 거의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에는 더욱 무엇인가 잘못이 확실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운동사료에서 연해주의병이 활발하게 전개된 1908년 4~7월 4개월 동안 문집에 그와 연관된 연해주의병 관련 기사가 한 마디도 없다는 데는 충분히 의구심을 가질 만 하였다. 더욱 안중근이 그의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安應七 歷史』이하 자서전와 여순 옥중에서 진술한 연해주의병 총대장 김두성金斗星에 관한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필자는 조선시대 5백 년에서 안중근 의사를 초기의 세종대왕世宗大王과 중기의 충무공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3대 위인으로 추앙할 만큼 깊이 존경하고 우러러보는 입장에서 그에 대한 연구로 학술발표에 참가한 일도 있다. 그와 같은 위인의 진술이 분명히 진실일 것이라면 무엇인가 근거의 해석이 잘못되어 진실이 규명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실제 안중근의 자서전이나 그가 하얼빈의거 후 옥중 신문과정에서 진술한 내용들은 같이 연루되었거나 또 일제가 정보를 얻기 위해 추궁한 인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실과 다른 증언의 사례가 발견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구명을 위해 거짓을 진술한 내용은 거의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가 진실을 말했을 것이라는 단적인 사례는 당시 시종 신문과정을 지켜 본 영국 기자 찰스 모리머Charles Morrimer가 그의 위인다운 당당한 모습을 사실적으로 전달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사형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대의를 위해 담담히 죽음을 기다린 안중근이 거짓으로 살아날 기회를 찾았을 이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안중근은 위인의 풍모를 지녔으며 그의 진술이 옳다고 믿는다면 그가 류인석을 1908년 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났다는 진술도 거짓일 수 없다. 그런 경우 류인석은 이미 1908년 봄 블라디보스토크에 실재한 사실이 입증되는 것이다. 또한 류인석의 연해주의병과 연관된 독립운동사료의 1908년 8월 함경도 정보자료인 ‘헌기 432호’의 연해주의병 창의와 관련된 부분은 안중근의 증언과 같이 류인석이 연해주에 갔다는 의미이다. 이 기사가 사실이라면 류인석은 분명히 1908년 4월과 6월 하순경 연해주에서 의병 창의에 관계했음으로 연해주에 실재했다. 그러나 그의 문집에는 그때 기록이 모두 한 줄로 시기와 장소만을 나열한 빈약한 기록이다. 그렇다면 문집의 소략한 기록은 누락이 있다는 것이다. 선행연구자들이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독립운동사료의 성격이 일제의 수사정보에 불과한 가치 없다고 인정하는 관행이 사실인가를 여러 방법으로 검증한 결과는 적어도 ‘헌기 432호’에 관하여는 사실성이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또 문집의 해당기간이 소략하게 기재된 것은 이 경우 자료의 누락을 의미한다. 즉 연해주의병과 관련된 자료가 류인석의 사후 간행과정에서 편집의 잘못이거나 아니면 일제의 방해와 간섭으로 타의에 의한 삭제이거나 자발적 누락에 불문하고 문집에는 빠져있다는 증거이다. 이런 사실을 감안한 자료의 활용이 올바른 결론을 낼 수 있는 연구의 방향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이와 같이 특정 기사인 독립운동사료의 ‘헌기 432호’를 표본자료標本資料로 선정하고 이에 대한 사실성을 검증하여 사실성이 있다는 확신을 얻고, 이와 연관하여 문집의 표본기간標本期間으로 선정한 1908년 4~7월간의 누락 부분을 보충하여 완전한 증거 자료로 활용할 때 류인석의 연해주의병에서 역할이 온전히 규명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행연구에서 이 부분의 감안 없는 연구결과는 완전한 연구업적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매우 미흡하다는 것이다. 사실적 자료를 인정하지 않고, 온전하지 못한 자료를 사실로 인정하여 얻어진 연구결과가 사실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해답이며 선행연구는 이 사실을 간과했다. 연해주의병 총대장 김두성에 대한 규명도 이와 같은 절차에 따랐다. 류인석이 1908년 4월 연해주의병 창의에 이범윤李範允, 안중근 등과 함께 참여했으며, 다시 6월 하순경 창의에 참여하여 창의대장에 올랐다면 자연스럽게 김두성과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을 공유하게 된다. 그런 경우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연해주의병 창의 때에 류인석이 국내 의병활동에만 전념했음으로 그때 김두성과 류인석이 같은 곳에 있지 않았다는 걸림돌이 자연히 해소되어 두 사람의 동일인 관계가 입증되는 것이다. 또한 이 연구의 결과로 류인석과 안중근이 연해주 한국의병진에서 같이 활동한 사실이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연속된 사건으로 안중근이 일제 한국침략의 수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격살한 하얼빈의거에서 류인석의 배후 역할이다. 이와 같이 안중근의 의병활동과 그의 하얼빈의거에서 류인석이 관련된 증거가 확실하며 이 연구의 중요 부분이다. 이 내용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류인석은 1908년 6월 하순경 연해주에 건너가 창의하고 창의대장倡義大將에 추대되었다. 둘째, 여러 근거로 류인석은 국내와 연해주의병을 아우르는 통합창의대장統合倡義大將이다. 셋째, 연해주의병 총대장 김두성은 류인석의 가명으로서의 창의대장이다. 넷째, 안중근의 연해주의병 활동에서 지휘자는 류인석이다. 다섯째, 안중근의 하얼빈의거는 류인석이 지휘한 근거가 확인되었다. 이 책에 실린 두 편의 논문은 학술회에서 먼저 발표하고 일부는 잡지에 기고했던 글을 보완한 것이다. 1부 논문은 2014년 10월 의암학회에서 연구 발표한 「연해주의병 창의대장 의암 류인석 연구」를 보완한 것이다. 이 논문은 『월간조선』 2014년 11, 12월호에 요약하여 발표하였다. 2부에 「안중근의 의병활동ㆍ하얼빈의거와 류인석의 역할」이란 논문을 추가하여 두 편의 글로 한 책을 엮었다. 이 논문은 2015년 12월 화서학회에서 발표한 글을 보완하였다. 『의암집』제10호에 기고한 「연해주 한국의병 총대장 김두성 연구」를 또한 참고하였다. 이와 같이 편집한 이 책은 『류인석과 안중근의 독립운동 』이라는 제목으로 류인석과 안중근이 서로 관련하여 벌린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을 고증하였다. 1부는 「연해주의병 창의대장 의암 류인석」이다. 류인석의 연해주의병 창의과정과 창의대장으로서의 활동이다. 특히 이 연구에서 중요한 독립운동사료의 사실성 검증과 문집에 누락된 자료의 보완에 상당한 부분을 할애하여 연구결과의 신뢰성을 높이려 의도하였다. 그리고 김두성과 류인석이 동일인임을 논리적으로 규명하였다. 2부는 「안중근의 의병활동ㆍ하얼빈의거와 류인석」이다. 안중근의 연해주의병에서의 역할과 하얼빈의거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그 배후 지휘자로서 류인석의 역할을 조명하였다. 다만 1부와 2부의 원활한 연결과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1부에서 이미 논증한 부분이 간혹 2부에서 중복된 경우가 있으나 이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일 것이다. 한국사 역사서의 특성상 한문漢文 표기가 많을 수 있다. 이 책에서는 한글로 먼저 표기하여 한문에 익숙지 못한 독자에 부응하고 글자 호수를 낮춰 한자로 병기하였다. 글 자체가 한문 글이거나 한문으로 쓴 저서의 경우는 한자漢字를 먼저 적고 한글로 병기하였다. 영문자가 필요한 경우 영자로 병기하였다. 독자의 빠른 이해를 돕기 위해 1부, 2부 전체에 대한 ‘국문초록’을 책머리에 싣고, ‘영문초록English Abstract’을 책 말미에 실었다. 또 독자에게 뜻을 떠올리게 하는 방법으로 영문으로 제목 표기를 병기하였다. 몇 장의 중요하다고 생각한 사진만을 관련 쪽에 싣고, 새로운 화보를 ‘부록’란에 실어 사건의 중요성을 일깨우려 노력했다. ‘찾아보기’는 가급적 자세하게 기록했다. 이 책이 출간되기까지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역사라는 학문에 아직 익숙하지 못한 필자의 부족한 경륜으로는 책을 내기에 난관이 많았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고마운 도움은 많은 힘을 보태었다. 먼저 늦게 한국사를 전공하는 과정에서 바른 방향을 제시해준 경희대학교의 김태영金泰永 명예교수와 또 무척이나 서투른 논문을 지도하여 만학을 끝내 준 구만옥具萬玉 교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대학에서 함께 봉직했던 이석태李錫泰 박사는 영문초록의 작성을 도와줌으로써 협조하였다. 아내 이승원李承媛은 늙은 사람의 건강 때문에 만류도 했지만 항상 버팀목의 역할을 했다. 집의 두 아이 수연修然과 성훈聖勳은 항상 자문에 응하여 젊은 사람들의 생각으로 일깨워주었다. 그 밖에도 도움을 준 많은 지인들의 고마움에 대해서는 함께 감사의 말씀으로 대신한다. 끝으로 경제적으로 출판사에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책의 출간을 맡아주신 『도서출판 한글』의 심혁창沈赫昌 사장께 이 자리를 빌리어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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