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2019년 한국사회의 모습을 상상해 본 것이다. 상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 작품을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혹자는 이 상상에 대하여 공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혹자는 공감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 좋다.
본인이 이런 상상을 한 것은, 현 한국사회의 난장을 함 이해해보자는 욕구에서였다. 현 한국사회가 난장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이해하려는 욕망이 없었다면 이런 상상은 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사람은 상상을 통하여 사물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상상은 허구이겠지만, 허구는 진실을 이해하는 한 행로요 지름길일 수 있는 것이다. 본인은 2019년의 한국사회를 상상해봄으로서, 한국사회의 어떤 진실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본인으로서는 이 상상이 진정코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이 작품을 읽는 독자 여러분도, 이 작품을 다 읽고 난 후 상상 속에서 본인이 본 한국사회의 어떤 진실을 보게 되기를 기대하고, 희망한다. 그걸 본다면, 여러분의 독서행위도 본인의 상상만큼이나 무의미했던 것은 아님을 수긍할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
이 작품은 특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영화대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온전한 의미의 시나리오는 아니지만, 시나리오 형식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영화형식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대본이고, 온전한 시나리오는 아니라는 점에서 또 소설형식을 못 벗어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양자를 결합해서 보면, 일종의 '영화소설'이라고 할 만하다.
예전에는 실제 '영화소설'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다. 영화를 받아들인 초창기 시절의 얘기다.
이 작품의 형식은 그렇게 영화의 초창기로 돌아간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런 과거의 형태를 도용한 이유는, 그게 오늘날 외려 효과적인 소설쓰기의 형식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비쥬얼이 극대화된 오늘날의 문화영역에서, 소설은 지나치게 비(非)비쥬얼적이다. 오늘날 소설이 맥을 못추고 인기가 추락해가는 핵심적 이유이다. 지나치게 읽기 위주로 되어 있는 소설은, 오늘날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보아도 좋다.
작가라면, 이런 상황에 의구심을 지니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독자는 비쥬얼을 요구하는데 작가는 반비쥬얼 작품에만 매달려 있다면, 소설의 미래는 없다고 보는 게 맞다. 소설의 비쥬얼화, 오늘날 작가들의 화두요 화두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오늘날 소설은 영화처럼 쓰여져야 한다. 나쁘게 말하면 세태영합이겠고, 좋게 말하면 시대와 호흡을 맞추고자 하는 눈물겨운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소설이다.
여튼, 이걸 보고 엥 이게 뭠밍 하는 소리가 나올 수는 있다 하더라도 독자를 작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하나의 작은 비쥬얼적 노력이었다는 것만큼은 이해해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또 하나, 이 작품은 자유인에게 바치는 헌사(獻辭)이다. 누구든, 이 작품을 읽고 자기 자신 안의 자유를 찾고, 자유인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리하여 자유민주통일혁명이 다른 누구 아닌 바로 ‘당신’의 손에 달려 있음을 감지해주기를 바란다.
자아비판시대를 위한 고언苦言-서문에 갈음하여
바야흐로 혁명의 시대다. 21세기 초반(2018년 현재) 한국사회는 혁명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정권을 잡은 자들이 그렇게 혁명정부임을 자임하고 있고, 이에 호응하는 대중들이 상당하다. 특히 젊은 대중들 사이에서 그 호응도가 높다. 나이 든 사람들은 철 지난 보수로 낙인 찍혔으며 사회적으로 무시되는 말로 ‘틀딱’이란 미명하에 역사 밖의 존재로 취급당한다. 혁명은 바야흐로 시작되었고, 한국사회는 그 끝을 예견할 수 없는 곳으로 달려나가고 있다.
‘혁명’의 시대에 혁명을 부인하는 것은 위험하다. 혁명은 필연적으로 독재를 낳고, 혁명에 대한 거부는 독재를 낳은 그 명분에 대한 거부가 된다. 독재에 대한 거부나 저항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래서 혁명은 늘상 사람들이 뿌리는 그 피로 장식된다. 혁명의 빛깔이 흔히 붉은색인 것은 그것이 핏빛이기 때문이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특별히 한국사회에서 혁명이란 무엇인가.
‘혁명’이란 게 역사 가운데 등장한 이래 이에 대해 설명하고 정의 내린 식자들은 수도 없이 많다. 크롬웰, 로베스피에르, 당통, 맑스, 레닌, 스탈린, 모택동 등 모두 이런 혁명을 정의한 식자들 가운데의 몇 사람들이다. 21세기에 혁명은 전혀 새롭지 않다. 낡은 고전에 불과하다. 혁명이 탄생하고 전개되어온 역사가 결코 적지 않음을 놓고 볼 때.
한국사회에서도 혁명은 심심찮게 있었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 혁명에서부터 시작해 4.19학생혁명, 박정희의 5.16혁명, 유신혁명 그리고 80년대로 넘어와 5.18광주사태, 87년의 6월시민혁명, 90년대에는 세계화혁명을 거쳐 2000년대 노무현의 서민혁명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는 가히 끊임없는 혁명의 시대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가히 혁명에 굶주린 사회였다고나 할까.
한국사회는 왜 이렇게까지 혁명에 굶주린 사회가 되었던 걸까. 적잖은 혁명을 수행해 왔으면서도 왜 여전히 혁명에 굶주린 채 목말라하고 배고파하는 걸까.
당연히 나오게 되는 의문이다.
혁명에 관한 그 수많은 설명과 정의 가운데에서 여기서는 딱 하나 ‘설계’라는 차원에 초점을 맞춰 그것에만 천착하기로 한다. 혁명에 목말라하고 굶주려하는, 마치 혁명좀비 같은 양태를 보이고 있는 한국사회를 이해하는데 무엇보다도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개념이라는 생각에서다. 설계라는 관점에서 볼 때 혁명은 설계를 위한 도구다. 설계주의를 가능케 하기 위하여 제일착으로, 제일선에 서야 하는 것이 혁명이라는 것이다.
해방 이후로 한국사회는 보여지는 그대로 가열 찬 설계의 시대였다. 그 대표적인 게 이승만의 ‘대한민국건국혁명’과 박정희의 ‘5.16혁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설계는 의외이긴 하지만, 크게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상당히 의미 있는 ‘부’를 축적하며 세계 굴지의 경제국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이들 양자의 설계가 의외로 성공한 데에 대하여는 한국인이라면 경의를 표하는 게 마땅하며, 또한 예의가 될 것이다. 20세기에 독립한 그 어떤 후진사회도 이만한 높이 이만한 경지에까지 성공한 사례가 달리 없는 탓이다. 그래서이겠지만, 이를 성공사례로 해서 연구와 탐구가 아주 다양한 방면에서 심도 있게 그리고 방대한 양에 걸쳐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새마을운동에 대한 조명과 재조명 그리고 재재조명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게 좋은 견본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들 양자의 혁명이 성공한 원인에 대하여 통상적인 접근과는 다른 관점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이들 양자의 혁명이 새로 탄생한 나라에 피와 살을 붙이려는 설계이긴 하였으나, 설계주의로까지는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북한 김일성의 강력한 설계주의와 비교하면 이 점이 더욱 분명하게 눈에 잡힌다. 6.25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강력한 설계주의 노선을 걸었던 북한의 김일성은 그로 인해 실패하고 세계의 골칫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점이 이를 실증한다.
이승만 박정희. 이들 양자의 혁명이 설계를 넘어 그와 같은 설계주의로까지 나아갔다면 이 양자의 설계는 성공이 아니라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필연적 실패로 끝나고 말았을 거라는 것이 필자의 관점이다. 물론 이들 혁명에도 설계주의의 그늘이 보이기도 했던 게 사실이긴 하다. 박정희의 유신혁명이 그것이었다. 유신혁명이 고개를 들었을 때 이승만의 건국혁명과 박정희의 5.16혁명은 더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에 반기를 드는 자들이 형성되었으며, 결국 그들의 벽에 부딪히고 그 위대한 설계는 그만 막을 내리게 되고 마는 것이다.
유신혁명이라는 설계주의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 다름 아닌 박통의 죽음을 기점으로 해서 나타난 286세대이다. 이들 286세대가 386, 486을 거쳐 지금 현재의 586세대에 이르고 있다. 286세대가 역사의 영웅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설계주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적 필연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위대한 건국 대통령 양인의 대한민국 건국 설계가 설계주의라는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것을 막고 정상화시키는 데에 일조를 하였던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286세대를 기꺼워하며 젊은 386세대에게 정권을 몰아주고 486세대를 거쳐 586세대의 혁명마저 기꺼이 허용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해피엔딩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나, 그것 자체가 그다지 간단하게 결말에 이르게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거나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제 와서 역사는 286, 386, 486세대와는 달리 586세대에 대하여 전혀 다른 결론, 다른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혁명을 통하여 정권을 잡았다고 주장하는 ‘586세대의 혁명정부’에 대하여 역사는 한국사회에서의 진정한 설계주의자들은 586세대 바로 그들이라고 말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설계주의가 바로 이들 586세대의 정체성이며 본질이라는 의미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586세대의 정체성, 본질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신물 나게 언급이 되고 추적이 될 것이다.
여기서는 서문의 모양새로 필요한 것 하나만 언급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설계주의의 종말에 관해서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설계주의의 궁극에 관해서이다.
재작년(2016년) 한국사회는 박 전 대통령을 탄핵으로 몰아내면서 신물 날 정도로 박 전 대통령을 욕하고 욕보였다. 광화문 네거리에 박 전 대통령의 나체 그림을 내걸고 발로 차고 때리고 화살촉(다트촉)으로 찔러대고 그것도 모자라 국회 로비에 박 전 대통령이 씹하는 그림과 사진을 걸어 놓기도 하였다. 이러면서 한국사회는 키득거리며 좋아 날뛰었고, 십 년 동안 쌓인 변비가 해소되는 듯한 쾌감과 만족감을 만끽했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마녀사냥이라 하였고, 한국사회의 비정상성이라고 하였지만, 이런 소리들은 세월호 노란 리본 상징에 밀려 묻혀지고 말았다.
이렇게 박 대통령을 제거하고 명실공히 586혁명정부가 들어서고 난 작년(2017년)부터는 이제 대한민국 자체에 대한 마녀사냥에 사람들이 광분하고 즐거워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이며, 북한에 비하여 현저히 부정하고 부당한 나라이며, 실제로 정통성이 없는 나라 아닌 나라라는 것. 다시 말해, 한반도에는 두 개의 정부가 있는데, 그 중 대한민국은 정당성 없는 부정의한 정부이고 김일성의 북한이야말로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정당성이 있는 정부라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박 전 대통령을 비방하고 욕하고 능욕하는 데에서 만족과 쾌감을 느꼈던 것과 똑같이 이번에는 대한민국을 욕하고 비방하고 욕보이는 데에서 쾌감과 즐거움을 찾고 있다. 대한민국에 대한 이런 저주와 비방, 능욕에서 한국사회가 쾌감과 만족을 느끼고 있다는 게 놀라운 일이긴 하나, 사실이다.
그럼, 한국사회의 전 대통령에 대한 능욕과 대한민국 자체에 대한 비방과 저주 욕보이기는 대한민국을 감옥에 쳐놓고 역사적으로 매장시켜버리면 마지막 종착지에 가 닿게 되는 걸까.
대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번 봇물이 터지기 시작한 비방과 저주 능욕은 쉽사리 끝나지 않고, 끊임없이 대상자를 바꿔가며 계속되어 가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 대상이 자기자신밖에 남지 않을 때까지….
종착지는 아직 멀었다는 것이다.
설계주의의 종착역은 ‘나’ 아닌 외부, ‘나’ 밖의 것들에 대한 비난과 저주 능욕으로는 결코 도달하지 못한다. ‘내’가 ‘나’를 비난하고 저주하며 욕보이고 능욕하는 그 지점, 흔히 말하는 ‘자아비판’의 지점에 도달해야 비로소 목적지에 도달됐음이 선언된다.
한국사회의 종착지는 2018년의 봄이 무르익고 있는 지금 어느 정도 그 윤곽선이 잡힌다. ‘내’가 ‘나’를 비난하고 저주하며 능욕하고, ‘내’가 ‘나’를 고발하며, ‘내’가 ‘나’를 교수형에 처하는 자아비판의 시대가 기다리고 있다는 예측이 강력하게 다가들어 온다. 살아있는 전 대통령 세 명 모두를 감옥에 쳐 넣거나 능욕하고 대한민국을 비방하고 저주하며 급기야 참수형에 처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는 지금, 한국사회의 다른 미래를 기대하고 예측할 수 있는가.
설계주의의 미래는 명확하다. 자아비판사회의 도래이다. 그리고 자아비판사회는 우리들이 생각하고 그려보는 그 이상으로 훨씬 더 끔찍하고 참혹하리라는 것. 이 점을 의심 없이 믿어도 좋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