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물들이는 말
2002년 봄, KBS 클래식 FM 〈세상의 모든 음악〉이 시작될 때부터 지금까지 저녁 6시에 방송되는 이 프로그램의 원고를 쓰고 있습니다. 물론 그동안 몇 번은 다른 프로그램에 다녀오기도 했고, 3년 정도 방송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다시 저녁 6시로 귀환하니 변함없이 기다려준 청취자들이 있었고, 제가 아무 데도 간 적 없었다는 듯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인
사도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인사를 오프닝에 넣게 된 건 2005년, 배우 김미숙 씨가 〈세상의 모든 음악〉을 진행할 때였습니다. 많은 분이 지적하시는 것처럼 ‘수고 많았다’는 말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하는 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맞춤법을 어기거나 사투리를 사용해야 꼭 맞는 표현이 될 때가 있는 것처럼, 원래의 사용법 너머의 사용법을 갖게 되었을 때 더 뭉클한 말이 있습니
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인사가 그렇습니다.
자기 몫의 하루를 보내느라 애쓴 사람들, 그러나 서로의 하루에 담긴 수고를 헤아려주기엔 너무 고단한 분들을 대신해 〈세상의 모든 음악〉이 그 인사를 건네기로 했습니다. 너무 젊은 진행자는 할 수 없는 그 인사를 김미숙 진행자가 전해드리자 많은 청취자가 그 인사와 얽힌 사연을 보내주셨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울컥해진다”는 사연이 도착합니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건 큰 수술을 받았던 때를 회상하는 어느 청취자의 이야기였습니다. 회복실에 라디오를 놓아달라고 부탁했다는 그분은 긴 수술에서 깨어나던 순간에 전기현 진행자의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목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책을 마무리할 무렵 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바람의 딸’ 한비야 작가가 보내주신 메시지였습니다.
“긴박하고도 처절한 구호 현장에서 〈세상의 모든 음악〉은 최고의 진통제이자 신경안정제였습니다. 저는 남수단 구호 현장에서, 로힝야 난민촌에서, 팔레스타인 구호 활동 중에도 〈세상의 모든 음악〉을 들었습니다. 특히 서아프리카 말리 북쪽은 내전으로 매우 위험한 곳이었는데, 그때 익숙한 세음 시그널과 전기현 님 목소리를 들으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안심이 되었고, ‘수고했다’ 등 두드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한 아이를 구하기 위해 모두 애썼던 어느 날엔 결국 그 아이를 살리지 못해 마음이 무너져 있었는데, 시그널을 듣고, 오프닝을 듣고,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인사를 들으며 펑펑 울었습니다.”
이 인사는 도대체 얼마나 멀리, 얼마나 깊이, 얼마나 속속들이 전해지는 걸까, 한비야 작가님의 메시지를 읽으며 저도 울컥했습니다.
시간 속에 흩어져버린 라디오 원고를 다시 읽고 싶다고 요청해주신 애청자들께 감사드립니다. 북토크의 현장에서 오랜 사랑을 고백하셨던 분들이 계셔서 한 번의 방송으로 사라질 수도 있었던 ‘말’이 ‘글’이 되고 ‘책’이 되었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사진과 그림을 선뜻 내어주는 아들 정빈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나의 가장 어린 애청자 조하루 군이 보내준 사랑도 잊지 않겠습니다. 방송을 자주 들어주시고, 주변의 반응까지 전해주시는 이해인 수녀님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2013년에 『오늘의 오프닝』을 낸 뒤 무려 12년을 기다려주신 ‘페이퍼스토리’ 오연조 대표님 덕분에 이 책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독자이자 원고를 늘 더 빛나게 전달해주는 전기현 진행자, 젊은 감각으로 제게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정혜진 프로듀서,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음악〉에 자신의 모든 수고를 바친 안종호 프로듀서께 특별한 감사를 보냅니다.
무엇보다 음악을 들으며 잠깐 걸음을 멈출 줄 아는 사람들, 오랫동안 〈세상의 모든 음악〉을 사랑해주신 애청자들께 깊고 뜨거운 감사를 전합니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2025년 크리스마스 무렵에, 김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