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을 자주 잃어버리는 편이다.
어디 물건뿐이랴,
어제의 각오까지 그럴 때가 있다.
그것들은 대개,
우주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기시감을 느끼는 모습으로 다시 나타날 때가 많다.
슬렁슬렁 그것들을 게으르게 떼어내다 보니
어느새 물이 들어오는 시간이 돼버렸다.
벗들이 돌아간 해 저문 바닷가에
나 이제야 詩망사리를 들고 일어선다.
아버지 무덤가에 첫 시집을 놓는다.
2014년 초겨울
우리 집 마당에는 매년 9월 초순이면 호랑나비가 알짱알짱 날아든다. 초피나무 두 그루에 알을 낳기 위해서다. 근 십 년 가까이 그 애벌레들은 단 한 마리도 부화하지 못했다. 초록 똥을 누는 애벌레는 그 집 푸성귀를 돌보던 이씨 부인의 손가락에 의해 짓이겨지기 일쑤였다.
올해도 호랑나비는 늦더위 탓에 일주일쯤 늦었지만 팔락거리며 대문을 타 넘었다. 마당 한 켠에서는 처서가 한참 지났는데도 무화과가 열리고 있다. 찬바람이 불면 채 익지 못한 채 모조리 마를 것이다.
얼마 전 길가 화단에서는 수박 줄기에 맺힌 손톱만 한 열매를 본 적도 있었다. 바람까마귀가 아무도 찾지 못하게 구름 속에 먹이를 숨겨둔 것처럼, 그들은 왜 무용해 보이는 일을 벌이는 걸까. 어딘가 차원이 다른 곳에서 애씀의 결과를 얻고 있는 건 아니냐는 바보 같은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글쓰기의 갈피갈피, 층층이 쌓인 층위를 다스려 세상이 내보이는 질감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었다. 알아챔과 끈기도 각성의 일부라고 여기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여러 해 동안 우리 집에서 산 사람이라면 한겨울에 바짝 말라 시커멓게 된 무화과가 새들의 먹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무화과가 열매를 밀어 올리는 것은 한겨울 먹이가 궁할 바람까마귀들을 위한 것이다. 알아차림이 둔해서 그렇지, 세상에 무용한 행위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이런 이야기가 좋다. 긴가민가하지만 떨림이 커서 하루 종일 설레게 만드는 기운 말이다. 부끄럽지만, 여기에 실린 지극히 사적인 수많은 졸고는 하루 오백 자 쓰기의 소산이라는 것을 밝힌다.
2025년 초겨울 제주에서
김세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