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다시, 달리고 싶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삶의 방식이 많이 바뀌었다. 여행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하고 일상 생활의 반경도 줄어들었다. 2023년에 들어서야 조금씩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그동안의 세상은 서로의 간격을 줄이기에 많은 장애물이 생겼다. 자전거에 텐트와 침낭, 먹거리를 싣고 한 달이 넘게 유럽 여행을 하기에는 체력적으로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다시 예전처럼 자전거를 타고 유럽을 여행할 수 있을까, 무모하지만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는 욕심이 사그라지면서 다시 도전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내 기억 속에서도 사라져버릴 것 같아 『자전거로 유럽 도시 읽기』를 다시 꺼내 들었다. 첫 장을 펼치기도 전에 동생에게 자전거를 처음 배운 날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안장에 앉아 두 바퀴로 균형을 유지하게 되자마자 무모한 내리막 달리기로 나동그라졌고, 온몸이 타박상으로 울긋불긋해졌지만 바람을 가르는 시원함은 앞으로의 여행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장소와 상황이 떠오른 것은 두 발로 자전거를 굴려가면서 여행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책에 실린 곳을 스트리트 뷰로 살펴보기도 하고 인터넷 주소를 찾아가면서 순간순간을 되짚었다. 캠핑장과 건축물 위주로 여행을 한 때문인지 다시 찾은 인터넷 속의 장소들은 팬데믹에도 무사했다. 전시물이나 운영 체제는 바뀌었겠지만 세월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였다. 로잔의 유스호스텔은 내부 인테리어도 그대로였고 곳곳의 캠핑장도 운영되는 것 같았다. 오르세 박물관을 향해 달리며 느끼던 파리의 전돌 바닥. 알프스의 브뤼니히 고개를 넘으며 여행을 후회한 순간, 그 이후 펼쳐진 내리막길. 자연 풍경 속 현대 건축과의 만남을 통해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던 그들의 공존 방식. 마지막 여행을 마무리하며 처음으로 레스토랑에 들어가 먹은 슈바인학세와 그리조스. 수많은 풍경과 여유로운 삶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기록되어 있었다. 파리에서 시작해 프랑크푸르트까지 달리고 걸으면서 만난 자연과 역사, 현대 건축물을 되짚어보고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글이 아닌 몸 안의 기록 덕분이다.
바젤의 커다란 달을 보며 소원으로 빌었던 삶의 모습을 닮으려고 열심히 살아왔다.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기 보다는 이웃과 함께 벗들과 함께 길을 만들면서 살아오고 있는 나 자신이 기특하기도 하지만, 여행 사이사이에서 만난 여러 기억을 놓치고 살아온 것 같아 새삼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가족의 배려, 교하 도서관의 응원이 없었다면 애초에 불가능한 여행이었다. 지금도 가족과 이웃의 배려, 마을의 응원이 있으니 용기를 내보자. 더 늦기 전에 다시 한번 역사와 현실을 버무려놓은 유럽의 자전거 길을 달리고 싶다. 같이 달리고 함께 책을 쓴 동생의 프롤로그 마지막 문장을 다시 한번 외쳐본다.
2023년 여름 교하 쩜오책방에서
이정은
에필로그 : 나를 찾아 떠난 행복한 시간 여행
자전거 여행을 함께 가자는 동생의 제안에 못 이겨 나이 마흔을 넘겨 자전거를 배웠다. 쉽게 배운다 싶더니만 제대로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온몸에 시퍼렇게 멍이 들곤 했다. 하지만 타고난 재능이 숨어 있었던 걸까? 자전거를 배운 지 한 달 만에 70킬로미터 장거리 라이딩에도 지치지 않는 무한 체력에 나 스스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도 달리는 순간이 행복했다.
지난 여행을 이야기할 때마다 주위 사람들에게 자전거로 여행해보라고 권하게 된다. 관광지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기억을 더듬는 여행이 아니라 마을을, 도시를 통째로 몸에 각인시킬 수 있는 여행이 될 테니까. 정해진 코스에 따라 자동인형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생경한 골목 풍경이라도 만나면 그 안으로 풍덩 빠져들어갈 수 있는 여행이 될 테니까. 1,800킬로미터는 서울에서 부산을 왔다 갔다 두 번하고도 조금 남는 거리다. 자전거를 타고 파리의 번화가를 달렸으며, 알프스 산맥의 가파른 오르막을 달렸다. 비 내리는 라인강을, 맞바람에 고개를 들지도 못하는 네덜란드의 시골길을 달리면서 오로지 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삶에 쫓기듯 잰걸음질 치던 아줌마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긴 시간이었다. 동생과 함께하는 여행이지만 자전거에 몸을 싣고 달리는 순간만큼은 오롯이 나 혼자만의 시간인 것이다. 달리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을 길바닥에 많이도 던졌고, 앞으로의 계획도 많이 세웠다. 긴 시간을 달리고 난 지금, 무엇 하나 이루어놓은 것은 없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 않았나. 비가 내리면 비를 맞으며, 바람이 불면 몸을 움츠리며 오늘의 목표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법을 배웠다. 힘껏 페달을 밟으며 달리다 보면 어딘가에 있을 나의 미래에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