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명성황후를 진지하게 만나게 된 계기는 일본의 한국문화재 약탈 역사를 들여다보면서였다. 망국의 역사가 어둡고, 억울하고 답답했다. 그러나 명성황후와 고종의 궤적을 더듬어가다 보니 잘못 알았던 부분이 너무 많았다. 명성황후의 진짜 얼굴을 드러내 보이고 싶었다. 우리는 명성황후와 고종에게 ‘왜 부패한 조선을 개혁하지 못하고 외세에 나라를 빼앗겼느냐’고 비난한다. ‘외세에 질질 끌려다니다 결국 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돌을 던지고 있다. 명성황후와 고종의 시대는 수백 년 묵은 폐습이 쌓여 둑이 무너진 것이었다.
명성황후는 20대 중반 이후 줄곧 불면에 시달렸다. 늘 암살의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카리스마와 강인한 정신력으로 난세를 헤쳐 나갔다. 고종에 대해 ‘무능하다’는 암군暗君 이미지도 일본이 시작한 이미지 조작이었다. 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측근에서 일했던 미국인 오웬 데니는 고종을 현명하고 용감하며 강인한 왕이었다고 밝혔다. 이 같은 발언은 그를 조선에 보낸 청나라의 입장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었지만 데니는 솔직하게 발언했다. 명성황후는 생전에 고종의 그림자처럼 뒤에서 기민하게 활약했다.
《그림자 황후》가 명성황후와 구한말 역사에 대한 우리의 집단무의식을 조금이라도 바꿔놓는 계기가 되길 빈다. 이번 작품을 쓰면서 어떤 때는 칼날 위를 걷는 듯 아찔했고, 어떤 때는 바람 한 점 없는 망망대해를 노 하나 들고 건너는 막막함에 빠지곤 했다. 거칠고 먼 항해를 마치고 항구에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벅차다. 내가 《그림자 황후》를 쓰면서 역사와 대화를 나눈 것처럼, 독자 여러분도 그런 신이한 경험을 맛보길 바란다.
내가 명성황후를 진지하게 만나게 된 계기는 일본의 한국문화재 약탈 역사를 들여다보면서였다. 망국의 역사가 어둡고, 억울하고 답답했다. 그러나 명성황후와 고종의 궤적을 더듬어가다 보니 잘못 알았던 부분이 너무 많았다. 명성황후의 진짜 얼굴을 드러내 보이고 싶었다. 우리는 명성황후와 고종에게 ‘왜 부패한 조선을 개혁하지 못하고 외세에 나라를 빼앗겼느냐’고 비난한다. ‘외세에 질질 끌려다니다 결국 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돌을 던지고 있다. 명성황후와 고종의 시대는 수백 년 묵은 폐습이 쌓여 둑이 무너진 것이었다.
명성황후는 20대 중반 이후 줄곧 불면에 시달렸다. 늘 암살의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카리스마와 강인한 정신력으로 난세를 헤쳐 나갔다. 고종에 대해 ‘무능하다’는 암군暗君 이미지도 일본이 시작한 이미지 조작이었다. 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측근에서 일했던 미국인 오웬 데니는 고종을 현명하고 용감하며 강인한 왕이었다고 밝혔다. 이 같은 발언은 그를 조선에 보낸 청나라의 입장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었지만 데니는 솔직하게 발언했다. 명성황후는 생전에 고종의 그림자처럼 뒤에서 기민하게 활약했다.
《그림자 황후》가 명성황후와 구한말 역사에 대한 우리의 집단무의식을 조금이라도 바꿔놓는 계기가 되길 빈다. 이번 작품을 쓰면서 어떤 때는 칼날 위를 걷는 듯 아찔했고, 어떤 때는 바람 한 점 없는 망망대해를 노 하나 들고 건너는 막막함에 빠지곤 했다. 거칠고 먼 항해를 마치고 항구에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벅차다. 내가 《그림자 황후》를 쓰면서 역사와 대화를 나눈 것처럼, 독자 여러분도 그런 신이한 경험을 맛보길 바란다.
육영수 여사는 힘들고 외로운 사람이나 단체에 관심을 기울이면 그 대상이 나아지거나 일어설 때까지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며 살폈다. 한 번의 화려한 제스처나 관심이 아니라 진정 어린 사랑과 보살핌이었다.
국민의 소리에 귀기울이기 위해 육 여사 앞으로 쏟아져 온 편지들을 읽고 또 읽었다. 화장하는 시간 15분, 머리 손질하는 시간에도 편지를 읽었고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일도 편지 읽기였다. 육 여사는 ‘노블리스 오블리주’ 개념이 희박할 때 양지회라는 사회 지도층 부인들의 봉사단체를 만들어 함께 팔을 걷어 부쳤다. 이런 육 여사의 모습을 보다 깊고 넓게 보여주고자 노력했다.
포토에세이를 엮으며 여러 사진과 자료도 발굴했는데 그중 하나가 박정희 대통령과 육 여사가 업무를 보고 가정생활을 하던 1970년대 청와대 내부 배치도이다. 육 여사가 세운 정수직업훈련원은 1964년 서독 기업 AEG를 방문했을 때 기업 안에 세워진 전문기술학교를 보고 착안했다는 배경도 밝혔다.
육 여사가 남산에 세운 어린이회관은 1965년 뉴욕세계박람회장을 직접 관람한 뒤 영감을 얻었다. 세계 최고의 기업이 보여주는 미래상을 보고 어린이들에게 과학적 창의력이 얼마나 중요한가 깨달았던 것이다.
교만하지 않고 낮은 곳을 살폈고,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절제로서 영부인이라는 자리의 엄중함을 소중하게 지켜나갔다.
우리에게 위대한 유산을 물려준 육 여사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축복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