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금빛 계절에
맏딸이라 일찌감치 부엌일을 거들었다. 불을 때면서 어머니로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 "여자는 참아야 한다."였다. 이 말은 알게 모르게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굽이쳐 흘러온 시간을 되돌아본다. 옹달샘을 떠나 개여울을 거쳐 강으로 흐르면서 갈개꾼도 만나고 개골창도 지났다. 급한 물살에 휩쓸리기도 했다. 천둥과 번개를 거느린 폭풍우가 사정없이 몰아친 시간도 있었다.
정신없이 흘러오다 보니 제자리서 맴을 도는 나이에 이르렀다. 어떤 사람은 일선에서 물러난 이 시기를 '인생의 금빛 계절'이라고 한다. 부모 봉양, 자식 바라지 다 끝내고 한숨 돌려도 되는 나이, 경제력과 건강이 아직은 남아 있어 조금은 즐겨도 되는 나이라는 뜻이리라. 하지만 머무는 강물은 역할이 끝났다는 소리가 아니던가.
사람들이 금빛 계절이라고 하는 나이에서 문학을 만났다. 해는 이울고 갈 길이 멀다는 생각에 조급증과 회의가 수시로 일었다. 책상 앞에 앉아 머리를 싸맬 때는 느긋하게 여행 다니는 친구가 부러웠다. 편하게 살자는 말에 솔깃하기도 했다. 글은 쉬이 여물지 않았고, 사유의 곳간은 좀체 채워지지 않았다.
'굽이치지 않으면 강이 아니다' 이 말을 붙잡고 글쓰기에 매달렸다. 도망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렀더니 내 이름으로 된 수필집을 내기에 이르렀다. 강물 같은 인생을 흘러오는 동안 나를 지탱해준 참을성은 글을 쓰는 데도 한몫했다. 서른다섯 해 전에 가신 어머니가 내 문학의 지주였던 셈이다.
백혈병을 앓아가며 외조를 했다고 너스레를 떠는 남편은 자신이 아프지 않았다면 언감생심 '천강문학 대상' 을 받았겠느냐고 한다. 맞는 말이다. 세상에서 대가 없이 치르는 일은 없다. 힘들었던 시간들이 모여 책이 되었다.
간이 크다는 소리를 어릴 적부터 들어왔지만 책을 내려니 심장이 떨린다. 내 책이 개똥참외 꼴이 되면 어쩌나, 지레 걱정 하느라 밥맛을 잃었다. 내 글을 읽고 한 분이라도 일상에 지친 마음을 위로 받는다면 개똥참외는 아니지 않느냐고 두려운 마음을 다독인다.
과연 누가 나의 한 분이 되어 줄까? 그 한 분을 간절히 기다린다.
2014년 7월 어느날
눈 깜박할 사이 무슨 일이
젊은 날, 노년은 먼 풍경이었습니다. 누군가의 인생이자, 책 속의 이야기라고 여겼죠. 그런데 어느새 그 풍경의 주인공이 된 자신을 마주합니다. 눈 몇 번 깜박인 사이에 찾아온 이 계절은 허무로 다가왔다가도 고독으로, 때론 삶의 무게로 저의 어깨를 짓누릅니다. 그 무게를 견디며 발견한 작은 깨달음이 몇 편의 글에 담겨 있습니다.
일부 글은 부부의 ‘애정전선’을 기록한 일지처럼 읽힐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그락거리는 사소한 다툼 속에서도, 서로의 주름진 얼굴에 연민을 느낍니다. 그런 마음이 죽음이 데리러 올 때까지 부부의 사랑을 지켜가게 하는 힘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책을 묶고 보니 신호등이 되어버린 현대의 가치관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쓴 글이 눈에 띄게 많군요. 첨단 문화의 물결에서 ‘낙오자’라는 낙인이 찍힐까 안간힘쓴 흔적이라고 이해해 주십시오.
문학은 인생을 담는 그릇이라고들 하지요. 특히 수필은 체험의 열매를 나누는 문학입니다. 이 변화무쌍한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분들께, 첨단 문화에 쩔쩔매는 어리바리한 저의 모습이 백신이 되기를! 아울러 작은 위로가 되길 희망합니다. 황혼의 길을 걷는 분이라면, 제 글에서 당신의 그림자를 발견하실 거라 믿습니다. 제가 이 책을 펴내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