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로 마을에 온 지 스무 해. 시는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이웃들이 잠시 잠깐 건네주는 눈길이다. 찍어 놓은 자국이다.
텃밭에 고구마 순을 내고 마늘을 심고, 문 앞에 볼록한 비닐봉지를 두고 가는 이웃 할머니들. 막차에서 내리면 어둠을 덮어쓴 채 기다리는 마을버스 정류장의 긴 의자. 어둠을 몰아내는 새벽 경운기 쿵쾅대는 소리. 식당과 찻집이 생겨나고 늙은 모과나무와 은행나무가 사라진 골목. 그 어디쯤, 한순간 찾아온 고요가 써 놓고 간 기록이다.
밀양에서 태어나 밀양에 터 잡고 살면서 일제와 쉼 없이 싸우며 일생을 보낸 분들을 만나면서 밀양의 정신을 새롭게 만날 수 있었다. 나라 잃은 청년들의 맨 앞에 서서 뚜벅뚜벅 걸어간 백민 황상규 선생. 7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밀양에 돌아온 그에겐 아들과 딸을 잃었다는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백민은 거기서 다시 일어섰다.
1919년 3·13 밀양 만세의 시발점인 김병환 선생의 내일동 미곡상점(쌀가게). 거기다 폭탄을 숨겨 두었다가 밀양폭탄사건으로 선생은 옥살이를 한다. 서대문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밀양청년회에서 장례를 치른다. 그 밀양청년회의 터전 위에 밀양소년회가 창립되고 (…) 핵심 인물인 김종태는 개성 유년감에서 1년 징역을 살게 된다. 김종태가 갇혀 있는 동안에도 밀양소년회는 꾸준히 활동을 이어갔다. 이처럼 수없이 많은 이들의 싸움과 헌신 위에 오늘의 밀양이 있는 것이라 생각하니 자못 숙연해진다.
―후기 「가시를 걷어찬 밀양 사람들」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오는 기다림이라 비어 있는 건 모두 부시게 빛이 난다.
제1부는 삶의 순간순간 안테나에 잡힌 전파들이다. 골목골목 배추 시금치를 팔러 다니는 소리, 빈 새집이 전하는 소식, 어린 아이의 교통사고, 태풍에 넘어진 전나무가 전해주는 소식들이다. 그 소식들이 전해주는 깨우침이다.
제2부는 서정시가 가진 본래 모습을 찾아가고자 하는 짧은 노래들이다. 저녁 노을, 능소화, 초저녁별, 목련, 석류, 잠자리, 배꽃, 달하고 나하고 나눈 밀어들이다. 꽃 한 송이 태어나 처음 세상을 보는 눈부심의 세계.
제3부는 아이들과 만나 이룬 세계이다. 내가 가르치는 중학생들 -무논에 개구리처럼 떠드는, 생기 가득한 녀석들-과 우리집 두 아이가 걸러낸 시들이다. 화단에 핀 봉숭아꽃이 전하는 교육에 관한 단상들도 있다.
제4부는 내가 사는 고장 밀양의 노래이다. 사촌 산비탈 가득하던 진달래, 영남 제일의 누각인 영남루, 석화(石花), 아랑제, 내가 사는 가곡동 골목, 상업은행 앞 구두 수선하는 할아버지, 삼랑진 만어사, 활성 강가 풍경과 사람이 엮어내는 숨결을 노래했다.
제5부는 '은행나무'와 '어머니' 연작들을 묶었다. 11월이면 내가 사는 동네의 은행나무들은 넋을 놓게 만든다. '부챗살로 떠오르는 네 눈썹 / 그 맑은 눈에 화르르 날아오르는 / 나비, 노랑나비들.'
(2001년 10월 10일 알라딘에 보내신 작가 코멘트)